“형님, 책 받으셨어요?”
(사)화성연구회에서 오랫동안 함께 활동해 온 동네아우 고영익이 그답지 않은 수줍은 표정으로 묻는다.
연극배우면서 연출가인 고영익(극단 수원시민 대표)은 일제강점기 기생신분으로 만세운동을 펼치다가 체포돼 모진 고문을 당하고 옥살이를 한 수원의 애국지사 김향화(1897~미상)의 이야기를 담은 희곡집 ‘잊혀진 혼! 예기’(도서출판 돋을 펴냄, 144쪽, 비매품)를 출간했다.
참 재미있는 친구다. 생긴 것은 산적 두령 같고 목소리도 우렁찬데 정도 많은데다 뜻밖으로 꼼꼼하다.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하고 대기업에서 자동차 설계 엔지니어로 일했지만 이른 시기 직장생활을 접었다. 고향인 수원에서 공예작가로, 국가유산 교육사로 활동을 하고 있다. 특히 그가 ‘마지막 남은 아날로그 인문학’이라고 정의한 연극에 열정을 쏟아 붓고 있다. 지역의 역사 인물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문화 콘텐츠로 자리매김 할 수 있도록 연극이란 장르를 통해 지속적으로 노력해오고 있다.
그런 그가 이번엔 희곡집을 냄으로써 희곡작가로도 데뷔한 것이다. 이에 지난 주말 화성연구회 월례모임에서 만난 회원들은 아낌없는 축하의 말을 건넸다. 물론 뒤풀이 자리에서의 잇따른 술잔세례와 함께.
이 책이 반가운 것은 수원의 인물을 주인공으로 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사회적으로 천대받는 기생이란 직업이었지만 경찰서 앞에서 만세시위를 벌인 김향화 애국지사를 다뤘다.
이에 대해 작가는 “2019년은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의 해였고, 그와 관련된 친구인 조성진의 김세환 전시기획을 준비하면서 운명처럼 스쳐 지나간 인물이 바로 수원의 예기(藝妓) 김향화였다. 내가 가진 능력의 한계를 절감하면서도 그 인물을 연극으로 만들어 보겠다는 집착이 커져만 갔다”고 밝혔다.
작가는 11년의 직장생활을 접은 뒤 2011년도부터 연극을 시작했다. 처음엔 그저 어릴 적 꿈을 실현하고자 하는 작은 소망이었지만 여러 작품에 참여하면서 연극은 그의 마음속에서 후반부 인생의 주제가 되어 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나고 자란 고향 수원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그가 연출을 맡거나 배우로 출연한 작품들의 면면을 봐도 알 수 있다. 음악극 ‘선각자 나혜석’을 비롯, 나혜석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경희’, 그림자 인형극 ‘경희’, 수원을 대표하는 민족대표 김세환 선생과 의로운 기생 김향화 지사에 대한 업적과 역사적 의미를 전시해설과 연극을 접목시킨 복합공연 ‘아시나요’ 등이 대표적이다.
이번에 펴낸 희곡집 ‘잊혀진 혼! 예기’는 지역의 역사인물을 연구하는 역사학자 박도근이 쪽지 하나를 들고 누군가를 찾아 나서면서 시작된다. 과거의 기억을 갖고 있는 노인의 회고로 시작된 예기 김향화와, 지역의 유지이며 교육자인 김세환, 김세환의 제자인 영우, 수원의 일본헌병 아리따 중위 등 시대의 운명에 올려진 그들의 삶이 전개된다.
기생 신분으로 만세운동을 했던 김향화 지사는 1919년 3월 29일 수원예기조합원 30여 명과 건강 검사를 받으러 가던 도중 화성행궁을 헐고 지은 수원자혜의원 앞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현장에서 체포돼 투옥되고 극심한 고문을 받았다.
당시 매일신보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3월)29일 오전 11시 반경에 수원기생조합 기생일동이 자혜의원으로 검사를 받기 위해 들어가다가 경찰서 앞에서 만세를 부르며 몰려 병원 안으로 들어가 뜰 앞에서 만세를 연하여 부르다 병원에서 내어 쫓음으로써 경찰서 앞으로 나왔다가 인하여 해산되었는데 조합 취체 김향화는 경찰서로 인치 취조 중이더라’
수원 지역 성안 고로들 사이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가 고문을 받으면서 지르는 비명소리가 팔달산 꼭대기까지 들렸다고 한다. 그날 밤 학생, 상인, 노동자 등이 거리로 나섰다. 시위대는 김향화 지사의 석방을 요구하며 격렬하게 시위를 벌였다고 한다.
이후 2개월여의 감금과 고문 끝에 경성지방법원 수원지청 검사분국으로 넘겨져 재판을 받고 징역 6개월에 처해져 서대문 형무소에서 유관순 등과 함께 옥고를 치렀다.
이후 수원시의 노력으로 김향화 지사는 지난 2009년 4월 13일 임시정부 수립 90주년을 맞아 대통령 표창과 함께 독립유공자가 됐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후손을 찾을 수 없어 김 지사의 훈장은 지금까지 수원박물관이 보관하고 있다.
“머릿속에서만 떠돌고 매번 말로만 했던 그 집착이 부족한 실력으로 이번 희곡이 만들어졌습니다. 이제 조심스럽게 무대에 올릴 꿈을 꾸어봅니다.”
고영익 작가의 꿈이 이루어지기를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