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기의 '수원 詩, 수원 詩人'(64)] 송유나 '백련(白蓮)'
백 련 (白蓮)
송 유 나
긴긴 밤 바장이며 마른 시간 태우다가
기름 발라 쪽진 머리, 꽃대궁 밀어올려
달보다
해보다 먼저
시방(十方)세계 밝힌 꽃
뿌리가 깊을수록 흔들림이 적다던가
가슴앓이 뒤끝에야 염화미소 짓게 하고
한 순간
화엄에 드는
뎅그렁 울리는 종소리
종소리 끝자락에 메아리가 들어 있다
은은히 퍼지는 맑고 환한 내면의 듦이
깊숙한 속내를 들춰 울컥,
뜨겁다
용연의 연꽃은 하마 다 졌으려나. 일상의 호구(糊口)에 분분하다는 것도 핑계다. 마음만 먹으면 지척인데 그 발걸음을 내딛기가 여의치 못한 스스로가 안타까워 오래된 문학잡지 속에서 시 한 편을 꺼내 달래 본다.
위의 시는 2011년 『학국시학』 여름호에 송유나 시인이 발표한 「백련(白蓮)」의 전문이다. 백련. 이름 그대로 흰 연꽃이다. 시인은 간절히 꽃이 피기를 기다린다. ‘긴긴 밤 바장이며 마른 시간 태우다가’라고 했다.
아름다운 우리말이다, ‘바장이다’는 ‘부질없이 짧은 거리를 오락가락 거닐다.’ 혹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어서 머뭇머뭇하다.’라는 뜻을 지닌 우리말의 움직씨 중 하나이다. 그런데 이 시에서는 두 뜻을 함께 중의적으로 새겨도 무방하다. 피려는 연꽃은 차마 꽃을 피우는 일이 마음에 걸려 머뭇거리고 기다리는 이는 조바심에 오락가락 거닌다. 양쪽 다 마른 시간을 태우고 있음이다.
‘기름 발라 쪽진 머리, 꽃대궁 밀어올려/달보다/해보다 먼저/시방(十方)세계 밝힌 꽃’이다.
드디어 꽃대가 오르고 그 꼭대기에 꽃봉오리가 자리 잡았다. 이를 바라보는 시인의 눈길이 곱다 못해 차라리 눈부시다. 어느 여인의 쪽진 머리가 하얀 연꽃의 꽃봉오리처럼 정갈하게 빛나랴. 그 고운 자태가 달보다도 해보다도 먼저, 밝은 빛을 시방(十方)세계에 뿌린다.
어차피 사바는 진흙 바닥이다. 그 바닥에 두 발을 딛고 뿌리를 내리는 게 우리네 삶이다. 그러나 ‘뿌리가 깊을수록 흔들림이 적다.’ 깊은 번뇌다. ‘가슴앓이 뒤끝에야 염화미소’처럼 핀 하얀 연꽃을 만난다.
‘한 순간/화엄에 드는/뎅그렁 울리는 종소리’라고 했다. 순간이다. 깊고 험한 번뇌의 고해를 헤매다가 눈을 뜨는 순간은 그야말로 찰나의 깨달음이다. 오죽하면 만해마저도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이라 했던가. 만개한 연꽃을 바라보는 순간 시인의 가슴에선 쇠북이 울리고 일순 시인은 물론 모든 중생과 무정(無情)까지도 광대무변 그 꽃의 세계인 화엄에 든다. 비로소 ‘은은히 퍼지는 맑고 환한’ 깨달음이 ‘깊숙한 속내를 들춰’ ‘울컥’ 가슴을 ‘뜨겁’게 달군다.
분명 장마가 끝났다고 했는데 벌써 사흘째 제법 굵은 빗방울이 내리신다. 하긴 변화무쌍한 게 여름 하늘이다. 아직 지지 않았다면 용연을 덮은 연잎과 꽃잎 위로도 내릴 것이다. 방화수류정 걸터앉아, 덕분에 비를 피하고 하염없이 그 아래 용연을 내려다볼 일이다. 가슴에 깨달음의 쇠북소리 들릴 때까지. 좋은 시를 만난 김에 부질없이 튕겨보는 사념이다.
송유나 시인
2008년 『월간문학』 등단, 설록차문학상, 경기시학상 등 수상,
심리학박사. 사회복지학박사.
현) 심리학 및 사회복지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