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종의 문학잡설(134)] ‘서로 거슬리지 않으니 어찌 헤어질 수 있으리’
조선공산당 재건활동을 하다 1930년 2월에 피체된 지운(遲耘) 김철수(金喆洙, 1893-1986, 건국훈장 독립장)는 1심에서 10년형을 선고받았다. 변호사 김병로가 공소를 권유하자, “나는 포로일 뿐, 일본 제국주의 법률을 인정할 수 없다”며 거부하고, 마포의 경성형무소에 수감돼 긴 영어의 나날을 보낸다.[이 강의(剛毅)한 지절과 기풍은 1919년 3.1운동 이후에는 보기 어렵다] 그러던 1936년경에 ‘병감소제부(病監掃除夫)’를 자원했다가 그저 울울하기만 했던 수감 일상에 변화가 왔다. ‘중병감일광욕장(重病監日光浴場)’에서 일제치하 혁명전선의 대선배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과 조우하게 된 것이다. 이 대면은 본인 표현으로 ‘큰 낙(樂)’이었는데, 그 무렵 김철수에게는 또 하나의 대면이 있어, 앞 대면과 서로 더욱 뜻있게 한다.
조선인 간수에게서 얻은 ‘백국(白菊) 한 분(盆)’과 조우. 김동삼과의 첫 대면에서와 같았을 ‘잠도 못 이루었’는 ‘그 밤’에 ‘소감(所感)’이 없을 수 없어, 시 한 편을 지은 김철수는 이튿날 ‘日光浴場’ ‘마당’에 그 시를 써 김동삼에게 보여주었다.(「김철수 친필유고」, 『역사비평』 1989년 여름호(통권 제7호, 1989. 5), 348-374쪽)
別居何事多送迎 어인 일로 오래 헤어져 지내다가
迎菊當夕又迎月 흰 국화 맞이한 이 밤, 달도 맞이하네
月白花白我心白 달도 희고 국화도 희고 내 마음도 희어
白莫相逆將奈別 서로 거슬리지 않으니 어찌 헤어질 수 있으리
1행에서 알 수 있듯 국화는 화자에게 오래 헤어졌고 헤어진 시간이 길어질수록 더 그리웠던 님과 같은 존재이다. ‘어인 일’로 헤어졌는지 화자가 자문하듯 한 건 화자가 결코 몰라서가 아니다. 감방의 찌든 곰팡이 냄새처럼 너무 명백하고, 이제 겨우 만난 국화에게 구구하게 그 이야기를 하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현재 재회의 기쁨과 정서를 귀중하게 여기고 향유하겠다는 태도, 나아가 그 무엇보다도 국화가 가장 소중하다는 뜻도 있다 하겠다.
우리는 2행 ‘흰 국화 맞이한 이 밤, 달도 맞이하네’를 읽으며, 1행에 함축되어 있던 화자의 그 기쁜 심정을 거듭 감수하면서, 철창 너머 위 밤하늘에 뜬 흰 ‘달’, 교교 휘영 그 자태를 찬탄하며 바라보고, 또 국화를 소중히 쳐다도 보는 화자, 우리는 그 셋을 번갈아 응시하게 된다. 어느덧 우리는 화자와 시인을 일치시키면서 이 시의 시인이 수감되어 있던 감방을 결부시켜 이 시의 관련 정경을 천착해보지 않을 수 없다. ‘병감소제부(病監掃除夫)’의 ‘피병사(避病舍) 1호실’은 중병감(重病監) 병동에 있고, ‘한센병 환자실’인 ‘3호실’이 가까우며, ‘바로 옆에 시체차(屍體車)가 있어 날마다 시체 갖다가 널에 못 박는 소리’가 들리는 곳이었다. 하지만 그곳은 세속 그 어느 공간보다도 삶의 형이상을 체인(諦認)할 수 있는 공간. 아니 그 어느 곳보다도 순결하게 정화되어 있어 마음도 그렇게 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화자는 세속의 온갖 먼지가 사라진 이곳에서 오욕에 찌든 자신을 벗어나 자신의 근본을 자각한다. 그리고 다짐한다. ‘달도 희고 국화도 희고 내 마음도 희어/서로 거슬리지 않으니 어찌 헤어질 수 있으리’. 달과 국화만 희지 않고 ‘내 마음’도 그러하다고. 그러니 우리 셋은 이제 어떤 일이 있더라도 헤어지지 말자고.
우리는 중병감 병동에서 소생한 이 각별한 정조에 공명하면서 두 의의를 동시에 느낀다고 할 수 있다. 이미 드러났듯 화자는 부잡한 세속사에 염증을 느끼고 거리를 두고 명철(明哲)의 은일(隱逸)을 희구하며 자신을 위로하려는 자의식. 분명 감방은 그 현실이 아니지만 이 감방에는 현실 이상의 리얼리티가 착색되어 있다. 다른 하나는 이와 달리, 수감 생활에서 좌절하고 그런 일상에서 어느덧 무뎌지고 닳고 초라해진 자신을 정화하고 애초의 근본, 즉 내면에 조성된 오상고절(傲霜孤節) 기운으로 회복되는 애초 항일과 이념에의 절개(節介) 의지. 전자가 더 짙게 느껴지겠지만 김철수의 후일 모습을 보면 후자를 배제할 수도 없다. 1938년 10월에 8년여 옥고를 치르고 기사회생 겨우 출감한 김철수는 그러고도 항일운동을 계속하다가 1940년 여름에 친일 전향자 단체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時局對應全鮮思想報國聯盟)〉 가입 강요를 그야말로 오연(傲然) 거부했고, 또 다시 구금[예비 단속]되어, 8.15 광복을 공주형무소에서 맞이하였다.
1916년 봄 유학 당시 ‘아시아에서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새 아시아를 세우자’는 목적으로 국제 비밀결사 〈신아동맹당(新亞同盟黨)〉을 조직하고, 반제국주의 운동을 전개했던 김철수는 널리 알려져 있듯 1926년에 제3차 조선공산당[ML당]을 결성하고 책임비서로 일했으며 1927년 5월에 코민테른으로부터 조선공산당 제2차 대회를 승인받기도 하였다. 김철수가 김동삼과의 대면이 ‘큰 낙(樂)’이라고 하고, 국화시를 써 기쁘게 김동삼에게 보여준 면모에는 이유가 있었다. 김철수는 1923년 상해 국민대표회의에서 김동삼과 조우하였다. 김동삼은 의장이었고, 김철수는 생계위원이었으며, 더욱이 같은 개조파였다. 또 김철수가 1929년 3월에 만주 길림성 돈화현(敦化縣)에서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 조직에 참여하여 위원장에 취임했을 때, 김동삼은 그 직전인 1928년 12월 초에 만주의 정의부 신민부 참의부 3부 통합을 촉진하기 위해 정의부 지도자로서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혁신의회를 결성하고 의장으로, 또 그 하순에는 민족유일독립당 재만책진회(在滿策進會)를 조직하고 중앙집행위원장에 취임한 이래 그 활동에 동분서주하던 중이었다.
두 분의 생애를 일별하면 지향도 세대부터 서로 달랐지만 무엇보다도 서로 잘 소통할 수 있는 공통 자질이 있어 주목된다. 즉 소신과 시국관에 차이가 없지 않았으나, 독선과 교조주의를 배격하고 역지사지(易地思之)하며 좌우합작을 지지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거의 누구나 대의를 위해 파벌이나 배타보다는 소통과 통합을 지향한다고 하지만 대놓고 반대하는 자들이 있었고 명분만 내세웠을 뿐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통절히 안다. 1923년 상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에서 개조파와 창조파가 6개 분야에서 귀중한 합의를 하여 전체 독립운동 전선에서 기초로 공유하는 자산을 만들었지만, 임시정부 존치 여부에 끝내 합의하지 못하고 파행이 야기되자, 일송은 의장직을 사임하고 긴 탄식을 하며 무장투쟁 본위의 만주로 돌아갔고, 김철수는 몹시 실망하여 그곳 활동을 그만 두고 귀국하고 말았다. 개조파 창조파라 하지만 결국 권력 관련 좌우투쟁이 야기한 결렬. 20년대 말 통합운동도 이런저런 이기성 분열로 시달리는 가운데 1931년 9월 만주사변 직후인 10월 5일에 하얼빈에서 김동삼은 밀정의 공작으로 일제에 피체된다.
그런데 위 시에서 달은 달 그 자체이면서도 화자의 이상으로 추정할 수 있겠고, 그렇다면 흰 국화는? 혹시 짐짓 김동삼이나 김마리아의 비유가 아니었을까 추정하는 호사심리를 억제하기 어렵다. 어느 독립운동사 학자가 김철수가 생애에서 좋아한 두 사람이 김동삼과 김마리아였다고 했다. 김동삼은 상기 상황과 사정에 따라서 그럴 개연성이 이미 있다. 김마리아는 김철수와 사이가 좋아 주위에서 결혼을 권유하였는데, 고향에 본처가 있는 김철수가 마침내 절제하여 이루어지지 못했고, 1923년에 김마리아도 상해의 분열에 실망해 미국으로 유학 가면서 둘은 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안창호는 “김마리아 같은 여성이 10명만 있었다면 한국은 독립이 되었을 것이다”고 했고, 취조하던 일제 검사가 탄복할 정도로 의지가 강력하여 오상고절 국화의 기상에 잘 어울리는 인물이다. 2004년 독립기념관 경내에 “독립이 성취될 때까지는 우리 자신의 다리로 서야 하고 우리 자신의 투지로 싸워야 한다”는 어록비가 섰다. 두 사람을 번갈아 국화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