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쓸히 마주앉아 그리워하네 서로 그리운 그곳을’
1936년경 경성형무소 ‘중병감(重病監)’의 ‘일광욕장(日光浴場)에서 김철수를 만나 김철수의 국화시를 첫 독자로 읽은 김동삼은 그곳에 수감되었다는 사실이 시사하는 대로 중병을 앓고 있었다. 1911년에 만주로 망명하여 유하현 삼원보에서 경학사와 신흥강습소[후일 신흥무관학교] 설립과 운영에 기여한 이래, 비밀군영 백서농장 장주(1915), 서로군정서 참모장(1919), 대한통의부 총장(1922)을 역임하며 한교(韓僑) 보호와 무장투쟁에 종사한 경력으로 하여 김동삼은 별칭이 ‘남만(南滿)의 맹호’였다. 1931년 10월 피체되고 하얼빈 일본총영사관 지하 감옥에서 물고문 전기고문 등 잔인한 고문을 견디며 단식투쟁을 하다가 여러 번 의식을 잃었는데, 이때 이미 건강이 크게 손상되었고, 말년을 괴롭힌 지병 늑막염도 이때 발생한 듯하다. 1934년에 생명을 위협할 정도로 늑막염이 악화되자 김동삼은 옥사를 각오하며, 옥사를 부끄러워하고 무척 유감스러워하였다. 그해 《조선일보》 4월 2일자는 관련 상황을 알려준다.
“그의 병세가 위중하다는 통지를 받고 그의 친아들 김정묵(金定黙) 군은 멀리 북만주 하얼빈에서 서울로 와서 오래간만에 부자간에 상면을 하였다 한다. 병석에서 그는 병이 쾌소하지 못할 줄로 생각하였음인지 그 아들을 보고 “×××로 이런 일정한 자리에서 죽게 되는 것도 과분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라면 대개 풀밭이나 산 가운데서 남들이 어디서 죽었는지도 알 수 없이 죽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내가 원래 그런 죽음을 소망하였던 바인데 오늘날 이런 곳에서 죽게 되는 것은 유한으로도 생각된다. 죽기 전에 여러 친구들을 만나서 부탁할 말이 몇 가지 있지마는 어찌 마음대로 되겠는냐”하고 개탄하는 말을 하였다 한다.”
그렇게 일제의 철쇄 우리에 갇혀 거의 빈사(瀕死) 상태였던 ‘남만의 맹호’는 그 이튿날 같은 장소에서, 간밤에 쓴 자신의 화답시를 김철수에게 보여주었다.(「김철수 친필유고」, 『역사비평』 1989년 여름호, 통권 제7호, 1989. 5, 348-374쪽 참조)
繞床諦視黙連頭 탁상의 국화를 돌며, 자세히 살피다 가만히 머리를 맞대네
繞床淸儀若不流 탁상의 국화를 도는데, 그 맑은 자태 담수(淡水)처럼 흔들리지 않지만
遠隔東籬如有感 동쪽 울타리에서 멀리 떨어지고 막혀 감회(感悔)가 있는 듯
悄然相對也相求 쓸쓸히 마주앉아 그리워하네 서로 그리운 그곳을
1행에서 생략되었지만 ‘자세히 살피다’[‘체시(諦視)’]의 대상은 ‘상(床)’ 위 ‘국화’이며, 김철수가 이야기한 ‘백국(白菊)’일 텐데, 이 모습이 실제 정경인지 아닌지 알기 애매하다. 김철수가 김동삼에게 한번 감상해보시라고 그 국화를 빌려주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김철수의 지향과 그 시에 그려진 그 고상한 국화를 김동삼이 보지 못해 정중동(靜中動) 골똘히 연상하다가 조성한 의경(意境)이라고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그만큼 김동삼에게도 국화는 범상한 대상이 아니다. 주지되어 있듯 조선의 선비들도 매화 난초 대나무뿐만 아니라, 서리를 맞으며 오히려 피는 오상고절(傲霜孤節)과 명철은일(明哲隱逸) 품격을 지닌 국화도 부각하여, 시에서도 그 절조와 기상을 흠선(欽羨)하기를 좋아하였다.
10대 후반에 한말의 대유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 1827-1899)에게 집지한 김동삼과 1907년 17세 때 한말의 관료이자 지사였던 우당(愚堂) 서택환(徐宅煥)에게 집지한 김철수가 선비에게 국화가 어떤 존재인지, 더욱이 당대 국난의 우국충정의 정서가 가득했던 두 분이 모를 리 없다. 수인(囚人)이 된 김철수가 간수에게 국화를 부탁한 것도 그 맥락의 일환일 것이다.
김동삼도 새삼 애호와 존념의 자세로 1행에서 국화를 그런 시선으로 살피고, 드디어 ‘가만히 머리를 맞‘댄다. 이 모습은 우리도 이 모습을 가만히 주목하게 한다. 살피다가 무슨 생각을 하거나, 손으로 만지거나 쓰다듬지 않고, 국화의 ‘머리’에 시인이 자신의 ‘머리’를 맞대다니. 생각할수록 의외의 정경. 우리는 이 동작이 국화를 기리는 최고 경의이자 최대의 애정 표현이라고 느낀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몹시 서글픈 심정이 된다. 한밤 망국의 수인(囚人) 지사의 고적한 통정(通情), 그리고 그 침묵의 정경에 굳이 말할 필요 없는 불립문자 기구(祈求)가 함축되어 있다고. 또 그 어느 포옹과 키스보다 짙은 고매한 교감을 우리는 이어 느끼고 만다.
2행 초두에 1행에 이어 ‘繞床(요상)’이 등장한다. 그대로 읽어나갈 수 있지만 어색한 중복이다. 그래야 할 특별한 까닭을 잘 알 수 없고, 이 같은 사례는 시에서 보기 어렵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김철수가 김동삼의 국화시를 수십 년 지나 회억하면서 이 부분을 잘못 기억했을 수 있다고 추정할 수 있다. 하지만 한편 우리는 2행의 ‘繞床’을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1행에서 살핀 대로 ‘繞床’에 포함되어 있는 국화를 강조하는 의도에서 그렇게 연속하였다고 추정할 수 있고, 이 조사(措辭)를 수긍할 수 있다. 독시에서 문면에선 국화가 보이지 않지만 그래서 독자로 하여금 은근히 더 잘 보게 하며, 게다가 2행 전체는 ‘탁상의 국화를 도는’(‘繞床’) 시인과, ‘담수(淡水)처럼 흔들리’지 않는 ‘맑은 자태’의 ‘국화’는 잘 대조되며 정연한 구조를 이룬다.
3행에서 우리는 드디어 시인으로 여겨지는 화자의 내부 생각도 읽을 수 있다. 국화가 ‘동쪽 울타리’에서 멀리 떠나와 있어 감회(感悔)가 있는 듯’... ‘동쪽 울타리(‘東籬’)’, 우리는 그 자체로 알 수 있다. ‘東籬’는 저 유명한 도연명의 시구 “采菊東籬下 悠然見南山(동쪽 울타리 아래에서 국화를 따다가, 남산을 유연히 바라본다)”[「음주(飮酒)」 제5수]의 그 ‘東籬(동리)’ 아닌가. 이 유려한 탈속 심경 표현에서 알 수 있듯, ‘東籬’는 바로 시인 도연명을 그런 경지로 이끌거나 그런 경지를 입증하는 국화, 바로 그 국화가 뿌리 내리고 있는 곳, 즉 국화의 집이라고 할 수 있다. ‘采菊東籬下 悠然見南山’에서 ‘采菊東籬下’가 없을 수 없지만, 만약 없다면 ‘悠然見南山’만으로는 그 경지 표출이 아무래도 미흡하다고 하겠는데, 김동삼의 국화시 3행, ‘동쪽 울타리에서 멀리 떨어지고 막혀 감회가 있는 듯’은 이상 사정에 관련되어 있다.
그렇다면 김동삼은 국화가 이런 감방과 같은 어떤 역경에서도 맑은 담수와 같이 흔들리지 않지만, 자신이 떠나온 율리(栗里)의 동리(東籬) 아래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고 여기고 있다. 국화를 의인화한다면 아니 이미 그렇게 되었기도 해서,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 감방에 있으니 어찌 그러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곧 우리는 시인의 이 추정이 국화에 그치지 않고, 일제의 감옥에 유폐된 시인이 자신의 처지를, 그리고 감옥에서 벗어나 그리운 그곳으로 돌아가고자 하나 그러지 못하는 비애를 국화에 투사(投射)한 그 대리 토로가 아닌가 추정할 수 있다. 4행, ‘쓸쓸히 마주앉아 서로 그리운 그곳을 그리워하네’란 상호동정에서는 더욱.
그리운 그곳은 어디인가. 활동과 투쟁의 보루였던 만주의 정든 기지일 수 있을 것이다. 일제가 병탄하기 이전 조국일 수 있으며, 1911년 만주 망명 이후 기약과 투쟁을 거듭하며 지향하는 광복 조국일 수 있을 것이다. 또 이들의 제유이기도 할 시인의 고향,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집은 그 278번지]일 수도 있을 것이다. 김동삼은 이 시를 쓴 다음해인 1937년 4월 13일에 경성형무소 중병감(重病監)의 그 감방에서 옥사하여, 그리운 그곳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김동삼은 1928년에 재만농민동맹에도 관여하면서 그해 4월에 정의부 신민부 참의부 통합을 위해 북만 김좌진의 신민부를 김원식과 찾아가, “광복의 제일 요체는 혈전(血戰)인 바, 혈전의 숭고한 사명 앞에는 각 단체의 의견과 고집을 버려야 할 것이며, 독립군이 무장하고 입국하여 광복전쟁을 감행하기 전에 세 단체의 군부가 합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채근식, 『무장운동비사』, 대한민국공보처, 1949, 147쪽)고 대동단결을 역설하였다. 같은 해 12월에는 정의부 지도자로서 기득권을 버리고 통합을 준비하는 혁신의회를 결성하였고,(의장) 또 민족유일독립당재만책진회를 성사시켰다.(중앙집행위원장) 김동삼의 이러한 과감하고 강력한 ‘이념과 노선의 통합 운동’은 오직 일제를 한반도에서 축출하여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충정 일념에서 비롯되었다.
김동삼의 장례를 심우장에서 주관했던 만해 한용운은 유례없이 대성통곡했다. 의아해하는 제자 김관호에게, “유사지추(有事之秋)가 도래하면 이 분이 아니고는 대사(大事)를 이루지 못한다. … 일송을 잃는 것은 전 민족의 큰 손실이요, 장래의 큰 불행”이라고 했다.(김관호, 〈일송 김동삼 장례〉, 만해사상연구회 김관호·전보삼 편, 《한용운사상연구 제2집》, 민족사, 1981. 09. 300-301쪽) 1937년 4월 30일자 『한민』(중국 관내 한국국민당 발간)은 추도사에서 일송의 30년 투쟁을 “부탕도화(赴湯蹈火) 풍찬노숙(風餐露宿)”이라 하고, “신망이 가장 많던 이”라고 하였고, 1937년 5월 3일자 《앞길》(중국 관내 조선민족혁명당 발간)은 일송의 지도자 인격을 “지공무사(至公無私) 개결무구(介潔無垢)”라고 하였다. 1937년 6월 17일자 《신한민보》(미국 대한인국민회 발간)는 특집 「한국혁명당 영수(領袖) 김동삼 선생의 서세」에서 선생의 일생과 공적을 기술하고 “권위 • 공의(公議•公義) • 열정”을 지니고, “연합정신을 재조(再造)하여 늘 왜적을 대항”한 “중국 한국 혁명당 중에 제일류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한편 같은 시대의 동지이자 후배인 김승학(1881-1964)은 사필(史筆)에서 “그는 민족 수난기를 통해 많은 독립운동 조직을 지도했을 뿐만 아니라, 누구보다도 성실하게 순난(殉難)의 길로 입신하여 투쟁했다는 점에서, 한국 독립운동사상 그가 남긴 업적은 실로 위대성(偉大性)에까지 육박하고 있다. 조국 광복을 위해 투쟁한 김구의 활동과 더불어 김동삼은 남만의 밀림을 근거로 일제에 대한 과감한 무장투쟁과 민족운동을 전개했다는 점에서, 그는 만주에서 활약한 한국 독립운동가로서의 상징적 존재였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고 평가하였다.(「南滿의 猛虎 金東三」, 『월간 세대』 1972년 3월호 참조).
2025년 제80주년 광복절을 맞아, 김동삼 생애에서 유일하게 남은 시, 감방에서 중병을 앓으며 죽음을 의식하고 지은 김동삼의 국화시를 다시 읽으며, 광복절의 의미와 의의를 되새겨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繞床諦視黙連頭[탁상의 국화를 돌며, 자세히 살피다 가만히 머리를 맞대네] 繞床淸儀若不流[탁상의 국화를 도는데, 그 맑은 자태 담수(淡水)처럼 흔들리지 않지만] 遠隔東籬如有感[동쪽 울타리에서 멀리 떨어지고 막혀 감회(感悔)가 있는 듯] 悄然相對也相求[쓸쓸히 마주앉아 그리워하네 서로 그리운 그곳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