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종의 문학잡설(139)] ‘꽃이 피는 때는/내가 보지 못하는 때’
반세기 만에, 고교시절 문학서클 「맥향(麥鄕)」의 동인이었던 고인(故人)의 시를 읽었다. 고교를 졸업하고 철도 역무원이 되었다가 대학에 진학해 영문학을 전공하고 교단에 섰던 그가 1988년 1월에 작고하기까지 몇 차례 만나 문학담론을 했고, 이후 가끔 그의 변성기(變聲期) 음성 같은 목소리를 떠올리며 그리워했었다. 그런 그와의 인연이 다하지 않았다니. 지난 주중에 우연히 처음 자리를 같이한 그의 고교동기가 그와 그의 시를 추억했고, 형의 유고를 오래 가슴에 품고 있던 그의 아우에게 연락해서, 그야말로 해후를 할 수 있었다. 고교시절 그의 다음 시는 당시 안동 문단의 주목을 끌었다.
저무는 겨울 저녁
도회의 잿빛 하늘을 날아드는
날짐승의 시린 발끝에 묻어나는
비린내 같은 사람들의 정갈한
조바심을 그으며 울려 내리는
적막한 사이렌 소리
- 「첫눈」/박경서(1956-1988)
누구도 모종 감상이 없을 수 없는 첫눈. 그 첫눈을 그저 ‘적막한 사이렌 소리’라고만 해도 읽을 만 했을 텐데, 그가 묘사한 ‘첫눈’은 모처럼 복잡하고 생경했었다. ‘사람들의 정갈한/조바심을 그으며 울려 내리는/적막한 사이렌 소리’라고만 했어도 그런 인상을 받지 않았을 것이고, ‘적막한 사이렌 소리’보다 그 수식, ‘정갈한/조바심을 그으며 울려 내리는’에 더 주의하면서 그 연관 파장에 독자들은 침잠했을 것이었다.
첫눈은 지상의 모든 사람들을 탄성으로 환호하게 하지만 화자는 왜 그 ‘도회’ 사람들이 첫눈과 관련하여 ‘조바심’, 즉 ‘답답하고 조마조마해 가슴 졸이며 불안도 느끼는 마음’까지 느꼈다고 하는가. 첫 행 ‘저무는 겨울 저녁’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이 눈은 그곳 시민들을 오래 기다리게 했기 때문일 것이다. 즉 계절이 이미 ‘겨울’로 접어들었는데도 눈이 내린 적이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 첫눈이 내린 당일에도 첫눈이 내린 그때는, 뒤늦은 그 ‘저무는’ ‘저녁’ 무렵. 그래서 화자는 사람들이 첫눈 내리기를 바라며 ‘조바심’을 내고 있었다고 전제하고, 마침내 첫눈이 사람들의 그 ‘조바심을 그으며’ 내렸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이 지연된 인식도 그대로 일단락되지 않는다. 이미 독자들이 의식하고 있듯, 또 하나의 수식이 그 모두에 중첩되어 있어 독자들을 놓아주지 않는다. 화자의 긴 심미 감각은 이제 독자들도 ‘조바심’ 나게 한다. ‘사람들의 정갈한/조바심을 그으며 울려 내리는/적막한 사이렌 소리’는 그러니까 이 시에서, ‘날짐승의 시린 발끝에 묻어나는/비린내 같은’과 불가분리이며, 독자들은 간과할 수 없다. 즉 그 ‘조바심’은 ‘사람들의 정갈한/조바심’일 뿐만 아니라, ‘날짐승의 시린 발끝에 묻어나는/비린내 같은’ ‘조바심’이다. 이미 그렇지만 ‘조바심’은 더 특이해진다. 독자들은 그 ‘날짐승의 시린 발끝’과 접촉한 듯한 촉감과 더불어 훅 ‘비린내’ 풍기는 ‘조바심’에 순간 몸서리치며 동요되고 경직될 수도 있다.
이 시의 ‘조바심’은 그렇게 마감되어도 좋을 텐데 그러지 않는다. 은밀하게 독자들의 내면에 저마다 남모르는 카타르시스를 일으키는 듯하다. ‘조바심’이 그이는 상태, 이 상태는 ‘조바심’ 해소, 바로 ‘조바심’이 폭발하여 산화(散華)되는 정화의 상태가 아니겠는가. 환희와 그 여운과 더불어. 그래서도 첫눈이 ‘울려 내리는/적막한 사이렌 소리’였다고 한 것 같다.
당시 안동의 문인들이 이 시를 칭찬 것은 이 시가 ‘견자(le voyant)’로서 본 바가 있고, 또 나름대로 표현이 성취되어 있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여러 감회에 젖으며 다음 시도 거듭 읽었다.
꽃의 얼굴은 근심이다
꽃의 얼굴은 우수이다
그러나
참된 꽃의 얼굴은 어둠이다
내게 있어서 어둠은 무서운 것이다
그래서 밤은 더욱 무서운 것이다
꽃은 밤에 피어난다
내 잠 속에서 피어난다
꽃은 새벽에 피어난다
꽃이 피는 때는
내가 보지 못하는 때이다
그래서 나는 꽃이 핀 것은
본 일이 있지마는
꽃이 피는 걸 아직 한 번도
본 일이 없다
어느 꽃이든 비밀을 가지고 있다
비밀은 어둠이다 비밀은
캄캄한 밀실이다
죄지은 자는 캄캄한 밀실에서는
더욱 하얗게 웃을 수 있다
피어난다는 것이
불행인 줄 모르는 아즉
피어나지 못한 꽃은
지금은 꽃 대궁 속 어느 새벽에서
소리죽여 걸어 나오고
있을 것이다
- 「꽃」
‘얼굴’이 ‘근심’과 ‘우수’이기 쉽지만, ‘참된 꽃’은 그런 기색을 무화한 듯 드러나지 않는 ‘어둠’. 그 ‘꽃’은 ‘밤’의 ‘내 잠 속’이나 먼동이 트려는 미명의 ‘새벽’ 꿈에 피어나는데, 화자는 ‘꽃이 핀 것은/본 일이 있지마는’ 정작 ‘꽃이 피는 걸 아직 한 번도/본 일이 없다’고 한다. 이 진술의 취지가 궁금한데, 5연 ‘어느 꽃이든 비밀을 가지고 있다’와 6연 ‘피어난다는 것이/불행’에 이르러, 우리는 알고, 내심 동요하는 가운데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시의 ‘꽃’은 우리 모두 자신도 잘 모르게 간직하고 있고, 몽매(夢寐)에나 출현했다 사라지는 나와 남의 모종 비밀들이며, 5연 4-5행으로 미루어, ‘캄캄한 밀실에서는/더욱 하얗게 웃을 수 있’을 그 ‘죄지은 자’이기도 하다.
‘더욱 하얗게 웃’는 ‘자’가 아니라, ‘더욱 하얗게 웃을 수 있’을 ‘자’라는 화자의 예정을 우리는 잘 감안하여, 연관된 ‘죄지은 자’도 ‘죄 지을 자’로 고쳐 파악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목해야할 국면은, 최종 6연에서 알 수 있듯, 화자에게는 현재, 도저한 집념처럼 그리워하는 인물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피어난다는 것이/불행인 줄’ ‘아즉’ ‘모르는’ 그 청초하고 가녀린 꽃봉오리 같은 그 인물이, ‘지금은 꽃 대궁 속 어느 새벽에서/소리죽여 걸어 나오고/있을 것이다’란 화자의 긴장된 예상이다. 그 장면에 직면해야 할 화자의 처지. 유례없는 ‘조바심’에 매이고 매인 안절부절 심경. 드디어 그 피어나는 모습을 화자가 볼 수 있을지 보지 못할지, 우리 독자들은 이제 그저 각자의 상상에 따를 수밖에 없겠다. 그런데 화자는 4연 1-2행에서 ‘꽃이 피는 때는/내가 보지 못하는 때’라고 한 바, 그렇다면 아마 또 보지 못할 것이다. 아니다. 화자는 보지 않을 것 같다.
이 시의 정황과 사연을 눈 감고 점검하는데, 누군가 ‘걸어 나오고 있’다. ‘소리죽’이지는 않고. 옛 「맥향(麥鄕)」 동인들의 ‘꽃 대궁 속 어느 새벽에서’. 청춘의 얼굴 그가 미소 지으면서 오히려 맑고 후련하게.
참고 : 이 시에 시인이 붙인 제목이 없다. ‘꽃’이란 제목이 원고에 있는데, 보관자가 일단 그렇게 작명했다고 각주를 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