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종의 문학잡설(140)] ‘우리를 천천히 들어 마셔버리는 초승달’

김승종 / 시인 · 전 연성대 교수

 

 후배 시인들과 비평가들이 3년 기다려 환영하는 최근 출간 시집에 수록된 다음 시에서, 화자는 상대에게 대번 ‘유리잔 속에서 자고 갈래?’라고 묻는다. 우리 독자들은 자신을, 객석의 관객이기보다는 가부를 답변해야 할 같은 무대의 상대로 설정하면 더 좋을 것이다. 무슨 유혹 같아서 다소 망설여지거나 용기가 필요하다면 상황극에 참여하듯이. 

 화자는 다감한 위로 어조로 권유한다. 그런데 우리가 무대에 섰어도 화자는 우리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2연에서도 ​‘자기 전에 물 마실래?’라고 또 묻는다. 

 

유리잔 속에서 자고 갈래?

파란색 물에 뜬 파란색 샹들리에는 조금 촌스럽지만

그래도 자고 갈래?

 

​자기 전에 물 마실래?

얼굴에 내려오는 수중식물의 가느다란 뿌리

곤충의 다리보다 더 가는 것

괜찮아 그것쯤이야

당신 얼굴 속으로 뿌리내리기는 아주 쉽지

당신 입꼬리를 살짝 올려줄까?

물의 세계에 온 걸 환영해

이건 어때?

 

​두 발을 타고 작은 식물들이 올라오는 방식

평온하고 슬픈 망각의 방식

당신 몸에 식물들이 칭칭 감기는 장식

 

예배하라

식물과 합체된 물의 몸!

 

​당신 입술엔 살짝 파란 거품

흐르지 않는 물에 매일 보태는 눈물

물에 잠긴 흰 새의 몸 냄새

흰색 망각

 

올배미가 푸른 밤을 높이 날아가며 본 것

너와 내가 잠든 푸른 유리잔 한 개

 

​잔에 뜬 푸른 얼음처럼 푸른 샹들리에

그 아래 깊은 물 속에

우리

 

죽은 자들이 전해주는 어떤 나라의 소식

 

물속에 잠겨 가노라면 있는 나라

블루 라군 롱 드링크 버전

심연에는 우리를 부르는 이들의 수많은 손가락

손가락마다 미끄러운 투명 손톱들

 

​레몬을 깔고 잠드는 시린 밤

우리에게 무관심한 이 슬픔

자기 전에 물 한잔 마실래?

 

우리를 천천히 들어 마셔버리는 초승달

      - 「초저녁」/김혜순 

 

 우리는 화자의 1, 2연 두 제안 직후에 어느새 설득되어 그러겠다고 대답하려 했으나, 결국 한마디도 하지 못하며, 화자는 자신의 말을 마치고 만다. ‘자기 전에 물 마실래?’는 10연에서 반복해 강조하고서도.  

 실망하지는 않지만 우리는 의아해하다가 끝 연 ‘우리를 천천히 들어 마셔버리는 초승달’에서 ‘초승달’의 입속으로 그것도 ‘천천히’ 넘어가는 자신과 화자의 모습에 다시 놀라며, 결말이 이러하니, 이 종국을 제대로 안 연후에, ‘유리잔 속’ ‘물의 세계’에 참입할지 말지 결정하라는 화자의 배려가 아닌가 추정한다. 

 우리는 2연에서, 그 ‘유리잔’에 화자와 담기면, 이미 담겨 있던 ‘작은’ ‘수중식물’이 우리 ‘얼굴 속으로’ ‘뿌리 내리기 쉽고’, 그 줄기가 ‘두 발을 타고’ ‘올라’와 몸에 ‘칭칭 감기는 장식’이 될 것이라고 화자가 예정해, 달갑지 않았지만[땅에 매장되어도 그렇게 되기 십상이긴 하지만], ‘평온하고 슬픈 망각의 방식’ 운운하는 3연에 이르러, 우리는 유혹한다고도 여기던 미심쩍은 시선을 수정하며 은근히 바라던 바라고 대답하고 싶었던 것이다. 불완전한 우리에게 ‘망각(忘却)’하고 싶은 과오나 한계, 외면할수록 현전(現前)하는 상흔과 죄업이 어찌 없을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우리는 ‘평온하고 슬픈 망각의 방식’에 내심 오히려 감사히 동의할 수 있었다. 

 그래서인가. 화자는 ‘식물과 합체된 물의 몸’을, 그러니까 그 상태를 ‘예배하라’고 하였다. 느닷없기도 한 명령조로. 화자는 그만 제어하지 못한 자신을 의식한 듯, 곧 부연한다. ‘망각’, 그 상태에서 이루어질, 축복과 다르지 않은 그 진행 표징을. ‘​당신 입술엔 살짝 파란 거품’이 일고, ‘흐르지 않는 물에 매일 보태는 눈물’이 날 것이라고. 또 ‘물에 잠긴 흰 새의 몸 냄새/흰색 망각’에서 우리는 더욱 위로받는다. ‘물에 잠긴 흰 새’가 드디어 탈색된 우리 자신인지, 망각된 우리 망각의 대상인지, 그리고 그 ‘몸 냄새’도 어떠하며 누가 맡는지 모호하지만 우리는 따질 경황도 필요도 없다. 망각은 그저 온통 ‘흰색’일 테니까. 

 하지만 6연부터 이전과 다른 장면의 예정이 연출되고, 우리의 긴장은 더 높아진다. 그 1, 2행에서 알 수 있듯, ‘올배미가 푸른 밤을 높이 날아가며’ ‘푸른 유리잔’ ‘그 아래 깊은 물 속’에서 ‘잠든’ ‘너와 내’를 내려다보며 그 상태를 인증할 것이라고. 그리고 음미의 틈도 주지 않고, 화자는 게다가 그 이전 시간으로 돌아가, 즉, 잠들기 전에 ‘너와 내’가 겪을 일을 말한다.  ‘죽은 자들이 전해주는 어떤 나라의 소식’을 들을 것이라고. ‘어떤 나라’는 ‘물속에 잠겨 가노라면’ 그러노라면 이르는 ‘블루 라군 롱 드링크 버전(Blue Lagoon long drink version)’이란 ‘나라’이며, ‘죽은 자들이 전해주는’ ‘소식’이란 자신의 ‘수많은 손가락’과 ‘손가락마다 미끄러운 투명 손톱들’이 ‘우리를 부르’고 있다는 전언. 

 이 대목에서, 우리는 이제 객석으로 돌아와야 한다. 어디까지나 시인의 기획에 따라. ‘블루 라군 롱 드링크 버전’은, ‘푸른 유리잔 속’ ‘물의 세계’의 특별한 일부[용궁과 같은]이면서, 보드카를 기본으로 한 하이볼 글라스 칵테일 그 자체로 홀연 부각되기에. 

 그리하여 우리는 본다. 천정에 ‘파란색 샹들리에’가 달린 어느 홀에서 탁자에 놓인 ‘블루 라군 롱 드링크 버전’ 한잔을 두 인물[화자와 화자의 상대]이 같이 들여다보고 있는 무대 정경을. 혹시 클로즈업한다면 화자의 상대가 우리 자신이 아닌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한잔 ‘블루 라군 롱 드링크 버전’의 ‘심연에는’ 과연 그 ‘수많은 손가락’과 그 ‘손가락마다 미끄러운 투명 손톱들’이 있고, 객석의 우리에게도 손짓하고 있는 모습도 목격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우두망찰 난경이 끝이 아니다. 화자는 자신과 상대가 드디어 ‘한잔’ ‘블루 라군 롱 드링크 버전’의 바닥에서 ‘레몬을 깔’고 ‘시린 밤’에 잠드는데, 주위의 그 ‘수많은 손가락’과 그 ‘미끄러운 투명 손톱들’의 ‘슬픔’은, 정작 ‘우리’에게 ‘무관심’할 것이라고. 아, 어째서 이럴 수 있다는 것인가. 화자는 무심한 듯한 어조로 드디어 말을 마친다. ‘우리를 천천히 들어 마셔버리는 초승달’이라고. 초저녁 ‘초승달’이 ‘우리를’, 그렇다, ‘평온하고 슬픈 망각의 방식’으로 ‘식물과 합체된 물의 몸’으로 잠든 ‘우리를’, 휴거(携擧)하듯 ‘푸른 밤’하늘로 ‘천천히 들어’ 올려, 자신의 일부로 채우는 귀속의 구원을 시행한다고.        

 끝으로 한마디. 화자가 두 번이나 ‘자기 전에’ 마시자고 권유한 ‘물’은, 말 그대로 물이 아니라 ‘블루 라군 롱 드링크 버전’ ‘한잔’. 화자가 이 술을 술이라고 하지 않은 것은 존재 전환의  특별한 상황에서 일상의 술로 여길 수 없기 때문. 탁월한 은유이기도 하다. 이 시선은 시의 묘사와 행간에서도 출몰을 거듭했다. ‘자기 전에 물 한잔 마실래?’라고, 한 번이 아니라 굳이 두 번 물은 것도 그 은근하고 농밀한 환기인 듯. ‘평온하고 슬픈 망각의 방식’으로 ‘식물과 합체된 물의 몸’이 되기 위해 필요한 이 물은 ‘성수(聖水)에 비견된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