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종의 문학잡설(141)] ‘사랑이 죽음이 되는 시간은 흘러’

김승종 / 시인 · 전 연성대 교수

 

 우리의 누구들은 지난날에 연인과 헤어졌던 적이 있거나, 장래에 어찌 어찌하여 그럴 수 있다. 이별을 다룬 시가 없을 수 없고, 앞에서 살폈듯 연인의 있을 수 있는 변심을 제어하려고 이별을 가정하고 그 정한(情恨)을 다룬 시들도 있으며, 재회 국면에서 그 심화 상태를 감수해볼 수 있었다. 

 사정에 따라 그 동기가 다양한 재회. 지속되는 미련을 이기지 못해서일 수 있고, 옛 연인의 현재를 걱정해서일 수 있고, 걱정 여부를 떠나 그저 궁금해서일 수도 있으며, 헤어질 때 못 다한 이야기를 부질없지만 그래도 하고 싶어서, 아니 그 무엇보다도 한번만 보고 싶어서일 수도 있겠는데, 이 모두 이별의 여정(餘情)에서 유래한다고 하겠다. 생에서 사로의 전환을 대의로 결단하고, 그 길을 떠나면서 읊은 옛 시의 “회수유여정[回首有餘情 : 고개 돌려 바라보니 그래도 남은 정 있네]”, 이 시구에는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의 그 미련 모습이 잘 투영되어 있다. 

 이와 달리 기대하지 않았던 재회가 있었거나 있을 수 있다. 재회를 기대하지 않았는데도 아니 오히려 꺼렸는데도 불구하고, 그 이반 상황에 봉착할 수 있다. 다음 시는 그 정황에서 출발한다. 

 

늦은 밤 편의점 앞에서 당신을 만나다니

당신은 맥주를 사러 왔고 나는 라면을 사러 왔는데

편의점 계산대 앞에 줄을 서서

죽기 전에 잠깐 당신을 만날 수 있다니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당신은 아직도

겸손의 손으로 캔맥주를 들고

당신이 그토록 미워했던 나는

교만의 손으로 컵라면을 들고 그리운 눈인사를 나누며

아직도 사랑하는 척 부모님 안부를 묻는다

 

작년에 두분 다 돌아가셨다고

어머니 돌아가신 지 벌써 몇해나 되었다고

공연히 부모님 안부를 나누는 거짓의 입술에

돌아가신 부모님만 또 돌아가신다

 

이미 우리의 계산은 다 끝났다

우리는 서로의 이익을 계산하다가 돌아서서

결국 무엇이 순익(純益)인지 알지 못하고

사랑이 죽음이 되는 시간은 흘러

 

오늘 편의점 계산대 앞에서 다시 만났으나

당신이 산 캔맥주는 당신이 계산하고

내가 산 컵라면은 내가 계산한다

편의점에서 사랑을 판매한다 해도

 

할인가로 사랑을 살 수 있다 해도

우리는 다시 사랑할 수 없는 불량품

오늘 밤 편의점의 흐린 불빛은

우리가 함께 거닐었던 항구의 불빛처럼 쓸쓸하다

 

잘 가라 우리가 비록 편의점에서 잠깐 만났다 할지라도

부둣가를 밝히는 검은 불빛을 따라

또다시 밤배는 떠나간다

 - 「편의점에서 잠깐」/정호승

 

 1연 4행 ‘죽기 전에 잠깐 당신을 만날 수 있다니’란 탄성어린 화자의 심정, 그래서 우리는 화자가 ‘당신’과의 재회를 ‘죽기 전에’ 한번만이라도 소망하고 있었다고 여겼는데, 그 직후를 읽으면서 인식을 바꾸게 된다. ‘아직도 사랑하는 척 부모님 안부를 묻’고, ‘이미 우리의 계산은 다 끝났다’란 단언과 편의점에서 산 물품도 각자 ‘계산’하는 장면에만 이르러서도. 아무래도 화자는 ‘당신’과의 재회를 바라지 않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어째서 무슨 사정이었길래 그런지 우리는 두 사람을 동정하며, 이 세속의 여러 복잡하고 불우하게 꼬인 사연을 상상해보려 하지만 그럴 필요 없다. 화자는 무엇보다도 이별 당시 자신과 ‘당신’, 그 ‘우리’의 태도를 문제시하고 있다. 그렇다. 쉽지 않더라도 이별을 잘 하지 않거나  못했다면 후일 기억에서 더 후회스러운 것은 이별 이유보다 그 이별 방식일 수 있다. 이유에는 결국 체념하면서. 

 ‘우리는 서로의 이익을 계산하다가 돌아서서/결국 무엇이 순익(純益)인지 알지 못하고’ 헤어졌다는 고백. 즉 ‘우리’는 사랑의 분리에서 어떤 모면이나 새로운 기회를 얻을 ‘이익’이 무엇인지 우선 생각하고 별리를 감행했다는 것이다. 사랑 그 자체가 ‘순익’이란 사실을 잊거나 외면하면서 말이다. 그리하여 화자는 그 뒷날인 현재 결국 ‘우리가 함께 거닐었던 항구의 불빛처럼 쓸쓸’한 어조로 ‘사랑이 죽음이 되는 시간은 흘러’갔다고 독백하고 있다. 

 우리 독자들은 탄식할 것이다. 이별에도 반대급부가 없지 않고 해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왜 하필이면 그랬느냐고. 그랬다고 하더라도 이왕이면 서로를 위해 무언가 분식(粉飾)했다면 부끄럽기는 해도 혹 그보다는 낫지 않을까 하며.  

 화자는 회오에 잠겨 자조한다. ‘캔맥주’나 ‘컵라면’처럼 ‘할인가로 사랑을 살 수 있다 해도/우리는 다시 사랑할 수 없는 불량품’이라고. 동정이 이어지는 가운데 우리는 화자의 이 자조와 비하의 자의식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재고할 수 있다. 이미 그는 이별 이후 어느 시기에 바로 ‘결국 무엇이 순익(純益)인지 알지 못하고/사랑이 죽음이 되는 시간은 흘러’갔다고 각성하고 후회했던 자가 아닌가. 이별의 ‘이익’을 요행으로 여기거나 자기기만을 감당하지 않고 그렇게 후회했던 자라면, ‘우리는 다시 사랑할 수 없는 불량품’이란 토로는 그 반성의 과장된 감상(感傷)일 수 있다. 같은 인물로 여겨지는 같은 시집에 실린 다음 시의 화자는 옛 연인과 조우하기 전에 이미 아래와 같은 각성을 하였다고 할 것이다.  

 “엎질러진 물도 물이다/엎질러진 물도 마셔야 한다/엎질러진 물 앞에서 울 필요는 없다/물은 엎질러졌을 때 가장 깨끗하고 맛있다/나는 그동안 물을 엎질렀을 때 가장 목이 말라/엎질러진 물을 마시지 않은 적이 없었다/엎질러진 물도 엎질러진 뒤에는/강물 따라 흐른다/고요히 강의 바닥을 만나기도 하고/때로는 흙의 가슴을 만나 꽃을 피운다” - 「엎질러진 물」

 ‘엎질러진 물’들에 그 이별도 포함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엎질러진 물 앞에서 울 필요가 없다’고 했지만 이 말의 단호한 어조에 화자의 지난 후회의 울음이 아직도 묻어 있는 듯하다. 그래서 ‘엎질러진 물도’ ‘마셔야’ 하는 ‘물’이라고 각성할 수 있었으며, 그 뒤 ‘물’의 행로들도 모두 그 각성의 실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