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치의 악행과 왜곡된 욕망을 다룬 시를 읽고 우리는 반면교사 효과를 내세우지는 않더라도 우리가 부정하기 쉬웠던 인간 보편의 어두운 이면을 성찰할 수 있는 거울이라고 평가한다. 악당인 척하는 위악(僞惡)의 시도 그 일환으로 출현하여 주목을 끌면서 이색 감상이 이어져 왔는데, 따지고 보면 위악이 아닐 수도 있다.
그렇다면 위선(僞善)의 시는? 사실을 다루는 여러 말글의 덕행이나 지향은 그 원천이나 결과와 대비하면 위선인지 아닌지 쉽게 드러나는데, 시에서 그것들은 아이러니나 풍자의 시선이 개재되어 있지 않으면 그 여부를 판별하기 어렵다. 또 시는 허구의 장르로 화자가 시인과 다른 인물이라는 사실을 문득 각성하면[누차 거론해서 죄송] 판별 의사를 철회하게 되며, 혹 시를 지은 시인이 졸렬한 인격이고 시에서 제시한 고상한 이치와 맑은 지혜가 시인 삶의 실제와 무관하다는 사실을 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시를 뜻있게 감상할 수 있어야 한다. 시 자체의 상황에 개연성과 진정성이 있다면. 시인의 이상이나 희망 토로로 접근하며. 우리는 이미, “군자는 그 사람의 말이 훌륭하다고 하더라도 그 말만으로 그 사람을 추천하지 않고, 그 사람의 인격이 아무리 졸렬하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의 말이 훌륭하다면 그 말을 버리지 않는다.[子曰: 君子不以言擧人, 不以人廢言 : 『논어』 「위령공」 22장]”는 말씀에 승복하고 있지 않는가. 공자가 이 언급에 함축하여 최종 바라는 바는 말과 인격의 일치이며, 우리 또한 그러하다.
다음 시에서 우리 중 일부가 겪고 있거나 겪을 부부관계의 어떤 문제가 다뤄지고 있는데, 메시지가 결코 단순하지는 않지만, 남편 화자의 태도의 기초가 우선 보기에 우리와 비슷하면서도 못해 보이기도 해서 위악이나 위선과 무관하다고 할 수 있다.
그대에게 가는 길은 너무도 멀고 험하며
그대의 계율은 내 의지보다 너무나 높다
서서 누는 내 오줌의 지린내가
그대 청정한 후각을 더럽힌다고 하여도
그것은 단지 수컷 모두의 업보일 뿐 내 죄는 아니다
그대가 세마포 자락 흩날리며 선 그 언덕에
내 어미와 누이 그리고 첫사랑도 있는가
그들도 그대처럼 손과 발에 못 자국이 있는가
그대가 남의 창을 빌려 찌른 내 옆구리는
몸서리치는 고통으로 내 영혼까지 찢어놓는다
그대와 나 사이에 가로 놓여 황토 빛으로 몸부림치는
강물, 저것을 건넌다면 나도 그대 곁에 설 수 있을까
그러나 나는 도저히 그대에게 도달할 수가 없다
이곳의 하늘은 생명나무처럼 푸르고
지혜나무 열매 향기는 나를 취하게 만든다
그러니 그대여
그대는 저쪽 언덕에서 나는 이쪽 언덕에서
뚫린 상처에서 흐르는 다섯 줄기 고름에
제각기 베다니의 나드Nard 향유를 바르자
희잡 쓴 여인이여, 내 아내여
- 「바라밀다」/전범수
제목 ‘바라밀다(波羅蜜多)’에서 알 수 있듯, 남편 화자는 아내와의 갈등 없는 소통과 합치를 바라며 그러기 위한 노력과 시도를 수행으로 여긴다. 『반야경』에서 설법되는 여섯 바라밀다(六波羅蜜多)는 보시(布施) · 지계(持戒) · 인욕(忍辱) · 정진(精進) · 선정(禪定) ·지혜(智慧). 이러한 세목을 떠올리면 부부의 거리와 불화를 해소하는 노력을 바라밀다에 비견하며 자신은 세속 차안(此岸)에 있고 아내는 정토 피안(彼岸)에 있다는 설정이 지나치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부부관계는 그 어떤 인간관계보다 가깝고도 멀며 무겁고도 가벼운 양면성이 있고, 이 시대의 증가하는 이혼과 졸혼과 그 후유증을 두루 상기하면, 회복 시도를 그렇게 볼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화자는 자신과의 관계에서 ‘손과 발에 못 자국’이 없는 ‘내 어미와 누이 그리고 첫사랑’과 달리, 아내에게는 그것이 있다고 암시하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거듭 화자의 그 해소 노력을 바라밀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행복한 부부관계로 유지되는 가정은 기실 낙토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 시에서 ‘그대의 계율은 내 의지보다 너무나 높’다는 탄식과, ‘그대가 남의 창을 빌려 찌른 내 옆구리는/몸서리치는 고통으로 내 영혼까지 찢어놓는다’는 오뇌만 표출되어 있다. 우리는 아내의 대응과 화자가 겪는 고통의 깊이는 실감하지만 화자의 호소 같은 해결 권유, ‘그대는 저쪽 언덕에서 나는 이쪽 언덕에서/뚫린 상처에서 흐르는 다섯 줄기 고름에/제각기 베다니의 나드Nard 향유를 바르자’에서 동정과 공감이 저어될 것이다. 역부족이었다고 해도 어째서 최선의 바라밀다가 없었느냐며. ‘서서 누는 내 오줌의 지린내가/그대 청정한 후각을 더럽힌다고 하여도/그것은 단지 수컷 모두의 업보일 뿐 내 죄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러다가 우리는 마침내 다행하게도 우리가 주목하고 음미해야할 화자의 바라밀다가 있었고, 그것이 무엇인지 각성하게 된다. 여섯 바라밀다의 하나이며 다섯 바라밀다의 기초인 ‘지혜(智慧)’. 즉 ‘반야(般若) 바라밀’을 화자가 집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아내에게 함께 실천하기를 제언하고 있다고. ‘반야 바라밀’은 ‘무분별지(無分別智)’, 즉 ‘마음의 탐진치(貪瞋癡)를 수행으로 완전히 소멸하여 대상을 바르게 비춰보는 지혜’.
화자의 그 수행 의지는 3연에서 ‘그러나 나는 도저히 그대에게 도달할 수가 없다’고 하면서도, ‘이곳의 하늘은 생명나무처럼 푸르고/지혜나무 열매 향기는 나를 취하게 만든다’고 자부하는 국면에서 추정할 수 있다. 아내를 배려하고 아내에게 양보하는 화자의 태도로 보아 이 인식은 아집이 아닐 것이다.
그러니까 화자는 자신의 ‘오줌의 지린내’도 나는 ‘이쪽 언덕’과, 아내의 ‘청정한 후각’과 ‘세마포 자락 흩날리며 선’ ‘희잡’의 ‘저쪽 언덕’을 서로 같이 ‘무분별지(無分別智)’로 바라보며 하나가 되자는 특별한 희원의 제안을 아내에게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상 사정을 고려해 마지막 연을 다시 읽으면서 고양된 유종의 감상을 마칠 수 있다. ‘그러니 그대여/그대는 저쪽 언덕에서 나는 이쪽 언덕에서/뚫린 상처에서 흐르는 다섯 줄기 고름에/제각기 베다니의 나드Nard 향유를 바르자/희잡 쓴 여인이여, 내 아내여’.
참고로, 자신은 물론이고 아직 아내에게도 있는 ‘뚫린 상처에서 흐르는 다섯 줄기 고름’은 미망과 집착, 호오와 편향을 일으키는 오관(五官)의 오감(五感). ‘베다니의 나드Nard’는 예수가 예언한 십자가 고난과 재생 부활을 경건히 믿은 베다니 마을의 마리아가 그럴 예수를 예찬하기 위해 자신이 바칠 수 있는 모든 것의 상징으로 마련한 히말라야 산 희귀 향유이다. 마리아는 예수의 머리칼과 발에 기꺼이 감사하게 나드를 붓고, 예수의 발을 자신의 머리칼로 정성들여 닦는다. 이 행위는 마리아의 진실하고 절실한 신앙을 구현하는 수행이며, 화자가 자신과 아내에게 바라는 그 바라밀다에 해당한다.
이렇듯 이 시는 생략된 부분에 연계시켜 맥락의 의의를 음미하게 하는 매력이 뛰어나다. 생략에 가깝게 병렬되어 있는 불교와 기독교의 구원 관련 부수 국면과 이미지도 화자와 아내의 서로 다른 지취에 조응되고 있고 해서 양립이 어색하지 않다. 아니 하나로 조합하고 소통하자는 ‘반야 바라밀’[‘무분별지(無分別智)’]을 주제로 한 시다운 구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