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기의 '수원 詩, 수원 詩人'(74)] 박석수 '연무동 사신 私信'
연무동 사신 私信
박 석 수
오랫동안 객지로만 떠돌았지.
너를 찾아 수천 개의
불면의 밤을 온통 뒤졌어. 간혹
끼니를 거르고 잠들면 어김없이
아버지의 불호령은 떨어지고
나는 영산물을 뜨러 2킬로미터의 새벽
산길을 오르내렸지.
꽃이 수줍게 잠 깨는 소리랑
잎 푸른 나무 사이를 달음질하는
새벽 종소리를 데불고
나는 혼자의 산길을 오르내렸지.
노인들의 졸리움도 번개처럼 깨지던
그 차거운 영산물에 어리던 내 영혼.
그리고 오후엔 방화수류정 연못가에서
난이에게 서로 용잠자리 잡아주기 위해
“용잠자리 보배
꽈리 보배♪”를 외치며 목젖을 찢던
우리들의 변성기를 보냈던 연무동.
그러나 스무 살 이후에 찾아간
그 마을엔
눈을 찌르는 매움만 살아남고
내게 생존의 의미를 갖게 하던 너는
어디에도, 정말 어디에도 없었어.
시멘트로 바꿔버린 전신주에서
손톱으로 벗겨낸 석고처럼
음성 몇 갈래와
가물가물 잊혀진 노래.
내 시선이 가 닿는
모든 사물은 빗장을 걸고
나는 뿌연 시야를 손등으로 비벼대며
조용히 연무동을 걸어 나왔어.
역설이다. 천수를 다 누리고 고종명한 사람의 긴 생애보다 요절한 삶의 사연이 훨씬 긴 경우가 많다. 마흔일곱의 애매한 나이로 천명을 다한 시인 박석수의 삶도 참으로 짠한 사연들의 점철이다.
위의 시는 1976년 「시문학사」에서 간행한 박석수의 시집 『술래의 노래』에서 발췌했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외치며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릴 때마다 한 발짝씩 옥죄어 오는 아이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술래’의 기억을 바탕으로 하는 시들은 한결같이 우울하기만 하다.
쑥고개의 시인 박석수. 우리는 시인을 그렇게 기억한다. 태어난 곳이 우리가 흔히 쑥고개라고 부르는 송탄이고 그 기지촌의 정서 또한 그의 시 전편에 짙게 깔려 있음이리라. 그러나 정작 유년기의 대부분과 사춘기로 접어들기까지 시인의 거처는 수원 연무동이었다. 위의 시도 그 시절의 기억을 모티브로 한 시 중 한 편이다.
‘오랫동안 객지로만 떠돌았지./너를 찾아 수천 개의 불면의 밤을 온통 뒤졌어’를 통해 시인이 연무동을 ‘객지’가 아닌 또 하나의 고향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보낸 시절을 회상한다. ‘나는 영산물을 뜨러 2킬로미터의 새벽/산길을 오르내렸지.’
‘영산물’이라 함은 팔달산에 있던 영산 약수터에서 아침 일찍 뜨는 물이다. 지금은 황성행궁 복원과 맞물려 주차장의 확대 등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진 자리이다.
이후 이어지는 서정의 흐름이 참으로 아름답다. ‘꽃이 수줍게 잠 깨는 소리랑/잎 푸른 나무 사이를 달음질하는/새벽 종소리를 데불고/나는 혼자의 산길을 오르내렸지./노인들의 졸리움도 번개처럼 깨지던/그 차거운 영산물에 어리던 내 영혼.’이라 했다.
이른 아침이다. 밤새 잠들었던 꽃이 수줍게 잠을 깨는 소리는 어떤 소리일까.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부풀고 설렌다. 시인의 영혼은 명징한 영산물에 어린다. 그보다 순수하고 투명한 영혼이 또 어디 있으랴.
‘그리고 오후엔 방화수류정 연못가에서/난이에게 서로 용잠자리 잡아주기 위해 “용잠자리 보배/꽈리 보배♪”를 외치며 목젖을 찢던/우리들의 변성기를 보냈던 연무동’
시에 나타나는 시간의 흐름은 크게 세 갈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영산 양수터를 오가는 새벽녘과 아침나절의 시간 다음 이어지는 시공간은 오후의 방화수류정이다.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든 시인은 ‘난이에게’ 고추잠자리도 보리잠자리도 아닌, 그 잡기 어려운 용잠자리를 잡아주기 위해 용연 근처에서 ‘용잠자리 보배’를 외쳐댄다. ‘난이’는 누구였던가. 시인만이 아니다. 고만고만한 사내아이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나 보다. ‘서로’ 잡아주기 위해서라고 하였다. 팔달산 능선 위로 한나절 해가 기울 무렵 방화수류정에서 바라보는 노을빛과 같이 고운 시절이었다.
세 번째 시간과 공간적 배경은 성인이 되어 다시 찾은 연무동이다. ‘그러나 스무 살 이후에 찾아간/그 마을’은 모든 게 바뀌었다. ‘눈을 찌르는 매움만 살아남고/내게 생존의 의미를 갖게 하던 너는/어디에도, 정말 어디에도 없었어.’라고 했다.
‘술래의 노래’에서도 눈맞추던 난이, 시인에게 생존의 의미를 갖게 하던 난이는 어디에도 없고 ‘눈을 찌르는 매움만 살아남’아 있다. 그 매움은 산업화의 원치 않는 부산물로 우리네 삶의 공간을 둘러싼 매연 때문만은 아니었다. 신산한 객지살이 끝에 찾아온 추억의 장소는 공간의 외양만 달라진 게 아니다. 그 시간도 어디론가 흘러가고 없다. 결국 시인은 ‘뿌연 시야를 손등으로 비벼대며/조용히 연무동을 걸어 나’왔다고 했다.
나흘만 있으면 추석이다. 수원의 인구가 100만을 넘어선 지가 언제인지는 기록을 찾아봐야 할 정도로 오래전 일이다. 그만큼 인젠 토박이를 찾는 일이 의미가 없다. 많은 사람이 고향을 찾아 떠나갔다 올 것이다. 그러나 또 객지에서 고향 수원으로 돌아오는 사람도 없지 않아 있을 것이다. 이미 도시 환경은 상전벽해라는 말이 무색하다. 그래도 마음만은 ‘용잠자리 보배’를 외치던 그 시절을 아름답게 다시 꼽아보는 날들이 이번 연휴이기를 바란다.
박 석 수 시인
1949년 송탄에서 태어남
수원에서 유년시절을 보내고 중학교 2학년 때 다시 송탄으로 이주
1971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술래의 잠」이 당선
시집 『술래의 노래』(시문학사, 1976)
『방화』(평민사, 1983)
『쑥고개』(문학사상사, 1987) 등
1996년 뇌졸중으로 투병 끝에 유명을 달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