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기의 '수원 詩, 수원 詩人'(75)] 박일만 '억새풀처럼-끝에서 처음인 사랑 45'
억새풀처럼
- 끝에서 처음인 사랑 45
박 일 만
가을에 접어들자
앞산 아래 언덕이 하얗습니다
우리가 걸어왔던 길을 따라
계절을 품어 안은 억새풀들의
푸르렀던 생이 깊어가는 중입니다
당신과 나의 무더웠던 계절도
쉼 없이 달려와 깊어갑니다
가을이 오니 생이 간절해지고
하늘의 기색도 달라 보입니다
우리가 한때 화창하게 살아온
세상의 들판이 가만가만 변해가고
스산해져 가는 세상 가운데에서
당신과 나, 억새풀처럼 숙연해집니다
서쪽 하늘에 눈구름이 언뜻 보이지만
그러나 우리는 두렵지 않습니다
억새풀처럼 오히려 하얀 웃음을 멀리
더 멀리 날릴 것입니다
저무는 호숫가에서 얼굴도 씻어보고
바람 부는 들판에 나가 뛰어도 볼 것입니다
억새풀처럼 살아온 당신과 나
마음을 한데 묶은 덕에 줄기를 얻었습니다
세상 어느 들판에서 살아갈지라도
꼿꼿한 줄기로 뼈대처럼 서로 받쳐줄 것입니다
바람에 흔들려도 쓰러지지 않고
머리 하얘지도록 함께 저물어 가겠습니다
가을의 색깔을 악기로 연주한다면 무슨 악기가 가장 맞춤일까. 나는 아무래도 첼로인 것만 같다. 마흔둘의 나이로 생을 마친 천재 첼리스트 자클린 뒤 프레(Jacqueline Du Pre)의 연주로 듣는 브르흐(Max Bruch)의 콜 니드라니(Kol Nidrei)만큼 가을의 사유를 갚게 해 주는 소리가 또 있을까.
진중하면서도 깊은 사유에서 우러나오는 노년의 사랑 노래를 듣는다. 시의 부제가 ‘끝에서 처음인 사랑’이다. ‘45’라는 숫자가 붙은 것으로 보아 연작시인 듯싶다. 과거로부터 이어온 사랑이 아니라 ‘끝’에서 거슬러 올라가도 ‘처음’인 사랑이다. 삶의 유한성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그 삶의 끝에서 확인해도 처음인 사랑이다. 조락(凋落)의 계절이기에 그 사랑이 더 절실하다.
‘가을에 접어들자/앞산 아래 언덕이 하얗’다. ‘우리가 걸어왔던 길을 따라/계절을 품어 안은 억새풀들의/푸르렀던 생이 깊어가는 중’이란다. 가을을 맞는 주체가 1인칭 단수가 아니다. ‘우리’라는 복수다. 어디 깊어가는 게 억새만의 생이겠는가. 우리의 생도 그 가을날의 저녁나절이다.
‘생이 간절해지고/하늘의 기색도 달라 보’이는 시간이다. ‘한때 화창하게 살아’왔다. 그러나 ‘세상의 들판이 가만가만 변해가고/스산해져 가는 세상 가운데에’ ‘당신과 나’가 놓여있다. 비로소 ‘억새풀처럼 숙연해’진다.
아직은 하늬바람에 새털구름이 천천히 날개를 옮기는 하늘이다. 그러나 머지않아 저 하늘 낮게 겨울바람이 불리라는 것은 단순히 예감이 아니라 천리(天理)이다. 그래서 ‘눈구름이 언뜻 보이지만/그러나 우리는 두렵지 않’다고 했다. 그러면서 시인은 ‘억새풀처럼 오히려 하얀 웃음을 멀리/더 멀리 날릴 것’이라고 한다. 돌이켜 보면 ‘억새풀처럼 살아온’ 세월이었다. 화사한 봄날의 꽃처럼 웃음이 흐드러진 날도 있었지만 먹구름에 천둥이 울어대고 장대비 몰아치던 날도 있었다. 그래도 오늘이 있는 것은 신산한 세월을 버틴 것은 ‘마음을 한데 묶은 덕에 줄기를 얻었’기에 가능했다.
아직은 함께 할 시간이 더 남았다. 그 남은 날들 동안 ‘세상 어느 들판에서 살아갈지라도/꼿꼿한 줄기로 뼈대처럼 서로 받쳐줄 것입니다’ 억새처럼 억세게. 그리고 ‘바람에 흔들려도 쓰러지지 않고/머리 하얘지도록 함께 저물어 가겠’단다. 정확히는 몰라도 박일만 시인의 나이를 대충은 안다. 또래이다. 시인이 노래한 노년의 사랑이 더 가슴에 와 닿는 연유이다.
긴 연휴 내내 날이 궂었다가 모처럼 개인 하늘이다. 수원에서도 화서문 맞은편 성곽을 따라 오르다 보면 서북각루 바깥쪽 언덕을 타고 흘러내리는 억새의 물결은 계절의 전령으로서는 그만이다. 나들이를 권한다. 쪽빛 하늘에 온통 은빛 상감으로 새겨놓은 억새를 볼 수 있다. 돌아오는 저녁에 창밖 풍경이 보이는 찻집에 앉을 수 있다면 더없는 축복이다. 진한 커피 빛깔을 닮은 자클린 뒤 프레의 콜 니드라이 소리가 가슴에 들리리라.
박 일 만 시인
2005년 《현대시》로 등단
<송수권시문학상> ․ <나혜석문학상> 등 수상
시집 『사람의 무늬』, 『뿌리도 가끔 날고 싶다』,『뼈의 속도』, 『살어리랏다』, 『사랑의 시차(제부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