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종의 문학잡설(143)] ‘차라리 응시할 일이다’

김승종 / 시인 · 전 연성대 교수

 

 심장을 저미는 비애는 우리로 하여금 이탈하게 하면서도 집착하게 하는 방황의 정서이기 쉬운데, 우리가 정작 있는 그대로 그 전부를 회피하지 않고 정면에서 뚫어지게 바라보는 응시를 거듭한다면 더욱 참담해지면서도 체념(諦念)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 체념에 서로 다른 두 뜻이 있다. ‘희망을 버리고 아주 단념하기’. ‘도리를 깨닫는 마음’. 전자는 자주, 후자는 드물게 쓰이는데, 다음 시의 화자는 두 뜻을 잘 알고 전제하면서 자신의 선택을 담담하게 진술한다. 

 

슬픔을 덮기 위해

짐짓 과장하여 웃으면

결국 처연함만 남는다

차라리 응시할 일이다

을음이 마르면

술잔이 깊어진다

술잔에 빠진 오늘을 

말없이 홀로

바라본다

 - 「응시」/이호석

 

 화자는 자신과 타인에게 자신의 ‘슬픔’을 부정하려거나 분식하려하지 말고, 또 자신과 타인에게 위무도 바라지 말며, ‘홀로’ 그 ‘슬픔’을 ‘차라리 응시’해야 한다고 한다. ‘슬픔’을 ‘짐짓 과장’하면 결국 그 ‘슬픔’에 자기혐오까지 착종(錯綜)되어 결국 감당 못할 아니 그러고 싶지 않아질 자포자기 ‘처연함만 남는다’는 것이다. 이 상태는 절망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결국 이른 바 극단 선택을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슬픔’에서 오히려 우리가 깨달을 모종 이치와 도리는 다양하며, 우리의 일시 심사(心思)와 아상(我相)을 조정하거나 교정하는 진실한 힘이 있다. 그래서 이 시의 화자는 있는 그대로 ‘슬픔’에 어떠한 잡념도 없이 집중하여 그 깊은 바닥까지 뚫어지게 ‘응시’하며, 그러면 비록 ‘술잔이 깊어’질지라도 ‘울음’은 마른다고 한다. 

 독백과 같은 화자의 이 제언은 관념이 아니라 자신의 지난 경험에서 체득한 각성이라서 작고 큰 슬픔이 있는 우리에게 짐짓 용기를 준다. OECD에서 한국이 자살률 최고라는 보도가 거듭 알려지자 최근에 그 제어에 기여하는 시들이 조명되었는데, 이 시를 마땅히 그 대열에 보강으로 추가해야할 것이다. 더욱이 이 시에서 거론된 ‘슬픔’은 어제도 아니고 내일도 아닌 ‘오늘’ 현재의 ‘슬픔’.  

 그래서 우리는 이 시에 이어 우리의 감상을 심화할 같은 시인의 다음 시도 읽어볼 필요가 있다.  

 

문을 열고

사방을 둘러본다

미끄러지는 인생은 늘

왼쪽을 따라 오른쪽으로 돈다

벽과 벽이 만나는 자리

구석진 자리는 인생의 직각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한걸음씩 옮기며 

분무기로 소독약을 뿌린다

벽을 따라 걷는다

이정표가 없어도

벽으로 둘러싸인 곳은

내게 언제나 길이 된다

미로 같던 공간은 마침내

길을 내어주고

운명처럼

시작과 끝이 만나는 곳에서

문은 다시 열린다

       - 「방역」

 

 ‘문을 열고’로 시작하여 ‘문은 다시 열린다’로 마치는 이 시를 읽고 우리는 이 시가 삶의 한 국면 묘사에 해당한다고 여기고, 화자의 미로보다 못한 행로, 특히 ‘벽’이 바로 ‘이정표’란 암시에 거듭 탄식하다가, 화자가 두 시행을 각각 한 연으로 부각하여 우리의 삶이 ‘다시’ 그렇게 같은 방식으로 반복된다는 시사를 하고 있다고 문득 느낀다. ‘벽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왼쪽을 따라 오른 쪽으로’ 돌고, 또 돌고 하는 순환 같은 것이 삶의 여로가 아니겠느냐고. 

 우리는 동의하기도 저어되고 부정하기에도 저어할 것 같다. ‘미끄러지는 인생’이 아니라고 하기엔 과분해 하고, ‘벽과 벽이 만나는’ ‘구석진’ 자리’에서 ‘분무기로 소독약을 뿌린다’에는 동의하겠지만 말이다. 

 문제는 또 ‘시작과 끝이 만나는 곳에서//문은 다시 열린다’는 선언 같은 화자의 언명이다.  ‘다시 열린’ ‘문’ 안의 공간에서 화자가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할 것인지 이제 화자보다 더 잘 아는 우리는 화자와 달리 그저 막막하기만 할 것인가. 

 그러다가 우리는 ‘벽으로 둘러싸인 곳은/내게 언제나 길이 된다’란 언급을 주목하고 처음과는 달리 화자의 비상한 의지를 제대로 실감하며, ‘미로 같던 공간은 마침내/길을 내어주고’라는 언급에서는 우리의 첫 이해를 시정하게 된다. 길을 ‘미로 같던 공간’이 ‘내어 주’는 것이 아니라, 화자의 그 의지에 추동된 그 ‘공간’이 ‘길을 내어’준다라고. 우리는 신념과 같은 화자의 인식에 동의하고 싶을 것이다. ‘벽으로 둘러싸인 곳은/내게 언제나 길이 된다’는 화자의 진술에서 우리는 그 ‘운명’에 거역하는 화자의 절대 의지를 이미 느끼고 한숨 내쉬며 성원하지 않았는가.    

 그러고 보니 첫 연 ‘문을 열고’에서부터 화자의 그 숙명의 의지가 잘 함축되어 있고, 끝 연  ‘문은 다시 열린다’에도 그 의지가 그 이면에 내재해 있다. 

 부조리한 운명에 도피하거나 굴복하지 않고 굴레에 굴레로 저항하는 이 시 화자.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철학자 알베르트 카뮈가 수필집 『시시포스의 신화』에서 부각한 시시포스를 연상하게 하며, 이 시의 상황도 인간이 직면한 실존의 부조리, 그 알레고리의 하나로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시는 21세기 현대의 리얼한 변용으로 어디까지나 창신(創新)이 약여하다. 특히 이 시대의 영원한 굴레 ‘왼쪽을 따라 오른쪽으로 돈다’는 풍자와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한걸음씩 옮기며/분무기로 소독약을 뿌린다’는 시행이 그러하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폈듯 화자의 아이러니 능동성 의지가 더욱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