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종의 문학잡설(145)] ‘백년 후 아무도 기억해 줄 리 없는 세상에’
우리 인간의 삶은 시공에 매이는 한계가 있지만 시공을 초월할 수 있다. 현재에서 벗어나 객관 태도로 그 이전과 이후를 생각하고 지금 여기 자신을 조정하며 산다면. 조정 방도는 우리에게 너무 낯익어 문제다. 역대의 현인들이 언급한 대로 자신을 절제하고 남을 배려하는 지행(志行). 그런 각오를 하고 실천하는 이들이 없지 않겠다고 하겠으나, 우리 대부분은 어쩌다 그 자각을 한다고 하더라도 우선 당장 일상의 이해에 매몰되어 그 생각을 곧 잊고 산다. 또 겨우 시도한다고 하더라도 타인과의 이해관계에 얽혀 미욱하고 초라하게 훼손되거나 무엇보다 끈질기게 재활을 거듭하는 자신의 욕망에 좌절하기 십상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삶이 자신의 시공을 넘어서려면 자신의 모종 과도와 모순을 정직하게 헤아릴 수 있어야 하고, 자율로 절제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하며, 남이 알아주지 않더라고 그 견인을 유지할 수 있는 각오와 달관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의 거개는 이 과정 어느 단계에선가 애석하게도 실패하기 쉽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이 모습을 냉소하여도 포기하지는 않는 듯하다. 자신의 사망 이후를 내다보며 지금 여기 나의 삶을 당대 사람들(후손 포함)이 자신과 자신의 삶을 어떻게 여길지 궁금해 하는 이들 뿐만 아니라 그저 그렇게 살다가 드디어 종천(終天)에 이르고야 만다고 체념하는 이들도, 또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는 금언에 과연 이름이 나란 실체를 가리키는지 확신하기 어렵고 이름이 남는다고 하더라도 이미 죽은 내게 대체 무슨 영광이 될 것인지 외면하려는 이들도. 심지어 결국 허영의 미망에 불과하다고 동정하는 이들마저도 ‘백년 후를 생각한다’로 시작하는 다음 시를 대면한다면, 계속 읽으려 할 것이다.
백년 후를 생각한다.
백년 후 나는 화 수 지 풍(火 水 地 風)으로 흩어져
우주를 떠돌 것이다.
내가 산책 속에서 만나던
한강 물은 흐린 낯빛을 하고
여여(與與)하게 흐를 것이고
하늘엔 구름이 느리게 걸어 다닐 것이다.
백년 후에도 어제오늘처럼 바람이 불고
천둥, 번개 치고 눈비가 내리고
달빛 휘장을 한, 밤의 상점에 별들의 전등이 내걸릴 것이다.
사계마다 색깔 다른 꽃들이 다녀가고
허리가 굵어진 나무들은 우뚝 서서
허공을 걸을 것이고
새들의 음표는 높고 발랄, 경쾌할 것이다.
백년 후 아무도 기억해 줄 리 없는 세상에
내가 살던 헌 집은 새 집이 되어
낯선 이가 들어와 살 것이고
길에 남긴 족적은 흔적도 없이 지워져 있을 것이다.
백년 후 과연,
평생을 바쳐 쓴 나의 시편 중
몇 편이나 남아 누군가의 눈길을 끌 것인가?
- 「백년 후」/이재무
‘백 년 후’에 물론 나는 이 지상에 분명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공공의 차원에서 ‘아무도 기억해 줄 리 없’을 것을 이미 인정한 우리는 이 시의 15-18행, ‘내가 살던 헌 집은 새 집이 되어/낯선 이가 들어와 살 것이고/길에 남긴 족적은 흔적도 없이 지워져 있을 것이다’란 예견에 더욱 우리의 미래를 무기력하게 실감한다. 한 세대 아니 10년이나 20년이 흘러도 그렇다는 형편과 세정을 이미 체험한 우리. ‘백 년 후’라면 그야말로.
한편 우리는 이 시 도입부의 ‘백년 후 나는 화 수 지 풍(火 水 地 風)으로 흩어져/우주를 떠돌 것이다’는 화자의 언급에 크게 고무되기도 하였다. 이 좁고 각박한 세속을 좁쌀처럼 내려다보며 쾌활 무비하게 횡행하는 공활한 대 자유의 양상이 아니런가.
한편 이 시에는 그런 화자가 ‘백 년 후’에도 지속된다고 찬탄하는 듯한 어조로 예상하는 지상의 풍경들이 묘사되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특별하지 않다. 우리가 언제라도 화자처럼 산책하며 살피거나 고개 들면 누구나 볼 수 있는 정경. 하지만 세사에 지친 우리의 마음을 말없이 진정 위로해주는 무상(無償)의 자연 물상들이다. 5행에서 14행까지 제시된 그것들은 ‘강’, ‘하늘’ ‘구름’, ‘바람’, ‘천둥’ ‘번개’ ‘눈비’ ‘달빛’ ‘별’ ‘사계의 색깔 다른 꽃들’ ‘나무’ ‘새들의 음표’. 우리는 화자의 관련 수식으로 이 사물들의 모습과 행태를 음미하다보면 화자가 평소 그것들을 벗으로 여기고 자신을 위로하고 정화하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인자요산(仁者樂山)’ ‘지자요수(智者樂水)’의 전통을 이어 그 같은 취지로. 우리는 화자가 그것들에서 무엇을 교감하였는지 화자의 수식에서 유추할 수 있었다. ‘구름’ ‘천둥’ ‘번개’ ‘눈비’에서는 무엇을 관조하였는지 궁금하다.
그러다가 우리는 문득 이 문맥에 내포된 화자의 의사를 추정하게 된다. ‘백년 후’, 우리 사후의 세계에 남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의 ‘길에 남긴’ 우리의 분주한 ‘족적’이 아니라, 우리를 담담하게 매혹했던 자연 사물이라고. 이 비전 자체는 우리에게 낯익지만 우리의 삶이 아주 말끔하게 말소된 ‘백년 후’에 이 메시지를 결부 대비하여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현하 시공을 초월하지 못하는 인위의 한계와 유구한 자연의 순연한 지속 인식을 잘 갱신하게 하며 일정한 감회를 일으킨다.
이런 시각에서 우리는 이제 이 시의 마지막 네 행을 감상해야 할 것이다. ‘길에 남긴 족적은 흔적도 없이 지워져 있을 것이다’란 단정과, 이어지는 ‘백년 후 과연,/평생을 바쳐 쓴 나의 시편 중/몇 편이나 남아 누군가의 눈길을 끌 것인가’란 미련의 기대. 화자는 왜 서로 어긋난다고 할 진술을 하는가. 자신이 쓴 ‘시편’도 ‘길에 남긴 족적’의 하나가 아니겠는가.
그러다가 우리는 화자가 시는 ‘강’, ‘하늘’ ‘구름’, ‘바람’, ‘천둥’ ‘번개’ ‘눈비’ ‘달빛’ ‘별’ ‘사계의 색깔 다른 꽃들’ ‘나무’ ‘새들의 음표’와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각성할 수 있다. 자신이 쓴 시도 그 자연 사물들과 같은 속성을 지녀 그 일부로 병렬될 수 있을 텐데, 다시 말해 ‘달빛 휘장을 한, 밤의 상점에’ ‘전등’처럼 ‘내걸릴’ ‘별’과 같기도 할 텐데, 내가 산책하며 그것들을 바라보았듯 ‘백년 후’에 누군가 자연 사물들과 더불어 읽을 수 있을지, 의아스럽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탄식과 소망의 기운에 공감하면서도 한편 ‘백년 후 나는 화 수 지 풍(火 水 地 風)으로 흩어져/우주를 떠돌 것이다’에서 이번에는 우리 운명의 그런 종극을 무척 다행스럽게 여길 뿐만 아니라, 문득 자연 사물들과 그 속성을 닮은 시와 같은, 시공에 존재하면서도 시공을 초월하는 삶을 또 꿈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