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장 선생님! 이벤트(행사) 전문 회사가 주관한 귀교(주최) 운동회를 보았습니다. 부채춤 공연까지 지켜본 전직 교장으로서는 격세지감을 느꼈습니다. 교사들은 관행을 고수하려는 것 같아도 바꾸려고 들면 얼마든지 바꾸어버린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새 20년도 더 지난 일입니다. 이웃 학교 운동회를 구경하고 돌아가 “이 좋은 가을에 우리도 2, 3일 후 운동회 한번 하자”고 했더니 이런 촌놈을 봤느냐는 듯 “올해는 운동회 계획이 없다!” “학교 교육과정대로 하지 않으면 교육청에서 뭐라고 한다!” “체육복도 맞추어야 한다!” “운동회는 장기간의 연습을 거쳐 이루어지는 것이다!” 등등으로 공격해 왔습니다. 계획은 바꾸면 된다, 체육복이 없으면 각자 의자를 갖고 나가 앉으면 된다, 연습은 하지 않으면 된다, 일단 아이들에게 물어보고 결정하자고 맞섰습니다.
학생회에서는 당장 통과되었습니다. 그러나 2, 3일 후 운동회를 개최한 것이 아니라 담당 부장교사들이 운동회 계획서를 갖고 나타났습니다. 교장·교감·교무부장·체육부장이 모여 개회사, 국민의례, 대회장 인사 등 개회식부터 하나하나 검토했습니다. 사회는 누가 하고, 개회사는 누가 하고, 대회장은 누가 맡는지 묻자 그들은 의아해했습니다. “대회장이란 당연히 교장을 말한다” “왜 하필 교장이 대회장이냐? 나는 그런 것 맡기 싫다. 학생회 대표에게 맡기자”… 개회식 검토에 한참이 걸리자, 그들은 지친 표정이었지만 그때부터는 일사천리로 결정되었습니다.
사회나 진행은 물론 경기 준비·심판·정리도 학생들이 맡고 교사들이 적극적으로 도와주기로 해서 모두 흡족한 표정이 되었는데 누가 물었습니다. 교장이 대회장 인사도 안 하면 그럼 그날 뭘 하나? 교장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겨우 대회장 인사나 하는 게 교장이냐, 그런 것 안 하면 교장 자격이 없나? 그 대신 학생회장이 대회장 인사 원고 써오면 성심껏 검토하겠다.”
이렇게 보면, 학교는 바꿀 것이 너무나 많은 곳이었습니다. 우리는 교직원 회의 때 직접적으로 아이들 가르치는 이야기만 하자, 어떻게 하면 더 잘 가르칠 수 있는지 그런 걸 이야기해야 교육자들의 회의이고 학교 회의답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동안 지시·전달 중심 정기회의를 못마땅해 했으면서도 그럼 공문서 처리는 어떻게 하느냐고 걱정했습니다. 요즘은 다들 인식하게 되었지만 공문서는 교직원 회의에서 다시 결정해야 할 내용이 아니므로 그냥 선택적으로 실천하면 되고, 필요한 정보는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당시 전국적으로 유명한 서울 어느 명문학교 교장이 “똑똑한 교사 서너 명만 있으면 학교경영은 얼마든지 잘할 수 있다”고 한 인터뷰 기사를 J 신문에서 봤습니다. 그런 인물이 유명한 학교 교장이라니 기가 막혔습니다. 교사들은 교장보다 경험이 적을 뿐이지 더 많이 아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반박해주고 싶었습니다. 교사들은 변혁의 물꼬만 터주면 얼마든지 훌륭하게 가르칠 수 있는 소양을 갖추고 있지 않겠습니까? 행정실장은 문서만 정리하게 해서 그렇지 학교경영과 학생 교육을 위해 일하라고 하면 얼마나 좋아하는지 그런 인간에게도 한번 보여주었어야 했습니다.
교장 선생님! 우리의 학교, 우리의 학교문화는 어떻게 해서 이렇게 변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학생 중심의 교육과정을 운영하자고 해놓고 학생들에게 주도권을 주어보지도 못한 채, 운동회까지 이벤트 전문 회사에 맡기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지금 학교는 전인교육, 인성교육 같은 걸 전개하기보다 곧 인공지능이 전권을 휘두르게 될지도 모르는 지식교육에 매달리고 있으니 우리 교육 전문가들은 장차 어떤 일을 담당할 수 있을지 의구심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그 운동장에서 이벤트 회사 직원들이 학생들을 지휘하는 뒤편에서 그림자처럼 말없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교사들의 모습이 안타까웠습니다. 사회변화에 맞추어 의견을 모으고 학교운영위원회 심의도 거치는 등 모든 절차를 다 거쳤겠지요. 그렇긴 하지만 다 끝난 다음 기껏 한두 마디에 붙여 청백 점수나 발표하시는 교장 선생님을 바라보는 사이 슬픔이 밀려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