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종의 문학잡설(146)] ‘사람이 다니는 길만이 끊어져 있었다’
신문과 잡지에서 연재되던 장편소설이 언제부턴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문득 각성한다. 그 변전의 시기에 추이를 주목했던 2009년 4월 29일자 《기자협회보》의 「사라진 연재소설…신문과 문학은 지금」(민왕기 기자)에서 그 퇴조가, 비용, 지면대비 효과, 소설가들의 인터넷 선호 등의 이유로 1993년경부터 쇠락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1993년에 1200명 독자를 상대로 구독 상태를 조사했는데, ‘빠짐없이 읽는다’ 39명(3.3%), ‘거의 읽지 않는다’ 799명(66.6%)이었다고 했다. 이후 중흥 기미를 현출한 한 시기가 있었으나 지난 영광을 회복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문화 향유방식의 대세가 지면의 활자에서 시청각 영상 미디어로 이월되는 기저 환경 변화가 가장 큰 요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박경리의 『토지』(『현대문학』 『문학사상』 등, 1969-1994), 최인호의 「별들의 고향」(《조선일보》, 1972-1973), 황석영의 「장길산」(《한국일보》, 1974-1984), 김주영의 「객주」(《서울신문》, 1979-1983)」 등등이 연재되던 시절이 그 황금시대였던 것 같다. 상업성 통속성 논란도 있었지만 대중에게 화제가 되며 재미와 교훈을 널리 선사하던 중후한 위상뿐만 아니라 소설의 일반 영토를 직접 간접 확장하고 후원하는 역할을 충실히 하였다. 이러한 면모는 1917년 《매일신보》에 연재되었던 우리 근대 첫 장편소설, 자유연애를 다루기도 한 『무정』이 끼쳤던 영향과 비슷하다. 이후 염상섭의 「삼대」(《조선일보》, 1931), 채만식의 「탁류」(《조선일보》, 1937-38)는 당대의 정신 동향을 드러내며 객관화 각성을 촉구했으며, 한용운의 「흑풍」(《조선일보》. 1935)은 청나라 말기 인물들의 사회개혁과 남녀애정을 빌려 일제의 억압에 항거하는 저항의식을 강조하였다.
지난 주 화요일에 여주에 갔다가 오랜만에 여주박물관 황마관 1층에 개설된 〈류주현문학관〉에 들렀다. 류주현(1921-1982) 선생은 1960-70년대에 신문과 잡지에 역사 대하소설을 연재하며 대중의 열독을 이끌었던 당대 최고의 작가였다. 장편 「대원군」(《조선일보》, 1964-1965)과 대하 장편 『조선총독부』(『신동아』, 1964-1967)로 유명하지만, 「장씨일가」 「태양의 유산」 「자매계보」 등 주옥같은 중단편들을 후세에 남겼다.
선생이 1972년 『현대문학』 8월호에 발표한 「잠보다 긴 꿈」의 교정지가 관람객을 위해 팜플렛으로 비치되어 있었다. 다음 인용은 7.4 남북공동성명의 일환으로 추진된 이산가족의 방북과 재회를 다룬 이 작품의 시작 부분이다. 편의상 고치기 전 원고에 번호를 붙여 먼저 인용하고, 그 이후 퇴고 원고를 분리하여 제시한다.
ⅰ)들판 들판은 그대로 이어져 있었다. 산의 능선도 봉우리도 끊어져있지 않고 한 덩어리였다.
사람이 다니는 길만이 끊어져있었다. 오솔길도 도로도 철로(鐵路)도 끊어져있었다. 완충지대라고 했다. ⅱ)모두가 차례대로 늘어선 채 걸어야만 했다. ⅲ)그러니까 그런 사람의 행렬이 오랜 동안 끊어져있던 길을 연결시키고 있는 셈이었다.
번거롭고 불안한 수속을 끝낸 다음 다시 기차를 탔을 때 사람들은 몹시 흥분했었다.
푸른 들판은 하나로 이어져 있었다. 산의 능선도 봉우리도 끊어져있지 않고 한 덩어리였다.
사람이 다니는 길만이 끊어져있었다. 오솔길도 도로도 철로(鐵路)도 끊어져있었다. 완충지대라고 했다. 모두가 차례대로 줄을 선 채 걸어야만 했다. 그러니까 그러한 사람의 행렬이 오랜 동안 끊어져있던 길을 연결시키고 있는 셈이었다.
번거롭고 불안한 수속을 끝낸 다음 다시 기차를 탔을 때 사람들은 몹시 흥분했었다.
전자도 나름대로 한두 차례 교정을 거쳤을 것이고, 그대로 두어도 크게 문제될 하자는 없어 보이지만, 선생은 최종 단계에서 정밀한 검토 끝에 세 곳을 수정하였다. 참고로, ⅰ)에서 원경으로 조망되는 첫 장면 ‘들판’을 반복하였는데, 우선 어색해 보이지만, 이 소설의 주제 표출을 위한 의도에서 고려된 연쇄 표현이었을 것이다. ‘들판 들판’에는 둘째 문장에서 같은 취지로 병렬되는 ‘산의 능선’ ‘봉우리’와 함께, 분단 현실에도 불구하고 원래 그대로 남과 북의 땅이 ‘하나’로 이어진 ‘한 덩어리’였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함축이 있다. 직후의 셋째 문장 ‘사람이 다니는 길만이 끊어져있었다’는 앞 두 문장의 뜻과 대조되는 단절 형상이 선명하며 분단의 비리와 비애를 내포하고 있다.
이런 서두를 선생은 다시 검토하며, 앞 ‘들판’을 ‘푸른’으로 대체하였다. 아마 다시 생각해보니 ‘들판’을 반복하지 않더라도 둘째 문장이 ‘한 덩어리’ 의도를 같은 취지로 부각하고 있고, ‘들판’을 ‘푸른’으로 바꾸면 ‘들판’의 형상이 사실 묘사에 부합되면서 선명한 초점으로 독자의 시각을 자극하고, 또 푸른색의 순정 상징성 환기 효과까지 고려하여 퇴고했을 것이다. 참고로, 분단을 강조하는 단절 취지의 문장들도 앞 문장들처럼 둘이다. 이 대등 배려 역시 주밀한 의도의 산물일 것이다.
ⅱ)에서, ‘늘어선 채’를 ‘줄을 선 채’로 고쳤다. ‘늘어선 채’에는 일행이 서로 차례를 형성하고 무리를 이루어 섰다는 여운이 있고, ‘줄을 선 채’에는 일행이 북측 당국의 간여로 제어되어 섰다는 여운이 있어 서로 다르다. ‘줄을 선 채’가 사실에 부합하며, 북의 체제를 암시하기도 한다. 이 정황을 끝 문장에서 서술자는 ‘번거롭고 불안한 수속’이라 하였는데, 이와도 일관성이 유지된다.
ⅲ)에서, ‘그런 사람의 행렬이’를 ‘그러한 사람의 행렬이’로 바꾸었다. 대수롭지 않다고 할 수 있겠고, 독자의 독해에 맡길 수도 있겠지만 고치지 않고 그대로 두면 아무래도 ‘그런’은 직후의 ‘사람’을 수식하는 관형어로 국한되기 쉽고, 문의가 어색해진다. 문맥을 고려하면 이 문장에서 중요한 부분은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행렬’이며, ‘그런’은 ‘사람’만이 아니라 그 ‘행렬’까지 수식해야 문장 전체의 취지가 순평해진다. 그래서 선생은 ‘사람의 행렬’을 모두 수식할 수 있는 ‘그러한’으로 수정한 것일 것이다.
오랜만에 은사인 선생의 문장과 이면의 도를 음미하니, 마치 재학 시절에 못다 들은 수업을 선생으로부터 듣는다고 느끼며, 박물관 옆 흘러갔던 여강(驪江) 물결이 되돌아오는 듯한 감회에 젖었다. 그 팜플렛의 뒷면에는 창작 자세에 관련된 선생의 한 수필이 게재되어 있었다.
나는 글 쓸 때의 습관도 여러 번 변해 온 것 같다. 아주 초기에는 일체의 소음을 피한 채 책상머리에 꿇어앉아서 열중했다고 기억한다. 처녀작인 「번요의 거리」를 쓸 때의 자세는 차라리 처절하기까지 했다. … 정말 추웠다. 이가 딱딱 받치고 무릎이 곧아 오르고 손이 얼어서 운필조차 제대로 되지 않았으나 그래도 화로를 피했던 까닭은 하나의 고집이었던 것 같다. … 그 후 대구로 피난을 갔을 때 … 수복 후 서울로 와서는 또 달라졌다. … 그 후에 『대원군』을 쓸 무렵에는 심심치 않게 울었음을 고백한다. 역사에 너무 무식했기 때문에 역사 소설을 써보려는 게 『대원군』의 집필 동기였는데 정말 하룻밤에 한 회분을 쓰기가 어려웠다. 자료를 뒤지랴 어휘나 풍속이나 제도를 연구하랴 도무지 붓이 나갈 정황이 없었다. 그런데도 많이 읽힌다고 하니까 점점 어려워져서 정말 많이 울었다. 그 무렵 『조선총독부』도 함께 쓰고 있었는데 한꺼번에 근 2백매씩을 잡지에 연재해야 하는 관계로 늘 벼락 일을 했다. … 신경이 쇠약해져서 어떤 날에는 한의사를 불러 침을 20개씩 멎은 다음 시작하기도 했으니깐 『대원군』과 『조선총독부』를 쓸 때야말로 가장 비장한 투쟁적 자세였다. … 최근에는 테이블에 앉아서 단정히 쓴다.
- 「정 그리고 지」(1978)/류주현
추위로 온몸이 경직되고 운필 자체가 고통스러워도 화로로 난방을 하지 않고 끝내 견디며 창작을 진척한 건 창작에 경건하고자 한 의지와 헌신하고자 한 결심을 견지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정신일도(精神一到) 하사불성(何事不成)과 같은 구도의 자세를 방불케 한다.
선생은 43세에 『대원군』을 연재하면서는 울었다. 왜. 췌언이지만 의지가 나약해서가 아니다. 이미 언중에 표명되었지만 조금이라도 덜 부끄럽게 쓰기 위한 책임의식의 절절한 발로인데, 선생은 자신의 그 모습에서 자신을 채찍질하는 힘을 분출했을 것이다. 그러지 않았다면 장편 대하 창작의 대장정(大長程)을 주파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역사소설은 당대의 사실들을 무엇보다도 제대로 파악해야 개연성 있는 허구를 가미해 좋은 소설로 창작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여러 인물들의 캐릭터와 각축과 변수와 운명을 형상화하려면 그들의 서로 다른 입장과 지정의(知情意)를 유추해 엮을 수 있는 문사철(文史哲) 통찰이 없어서는 안 된다. 선생의 울음은 모든 작가들이 자신에게 질문하는 좌표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런 생각에 잠겼다가 이날 시인 우영창 선배와 필자를 안내한 소설가 엄광용 선배가 박물관을 나와 마당에 있는 선생의 문학비로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았다. 20여년 걸려 고구려 광개토태왕(374-421)의 삶을 글로벌 시대의 우리 기개와 경제 영토 개척에 비견하며 다룬 대하 장편 『담덕(談德』 10권을 쓰고 최근에 간행한 그의 그 행보는 선생의 그 모습과 닮아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