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기생들이 3·1운동 앞장… 경찰서 앞에서 “만세”

정부수립 60주년·광복 63주년 - 수원, 어떻게 달라졌나 일제강점기

▲ 1920년대의 남문시장. 우측의 건물이 당시의 수원면사무소와 수원공회당.

“철쭉꽃 딸기꽃이 초원에 피면은~ 타네요 수원처녀 가슴이 타네요~” 백영호 작곡, 이용일 작사, 이미자 노래의 ‘수원처녀’다. 큰 인기를 끌진 못했지만 노랫말에는 딸기꽃과 서장대, 청포도 등 1960, 70년대 수원의 대표적 명물들이 등장한다. 노래가 만들어지기까지 사연도 있다. 당시 춘천시장으로 재임하며 ‘소양강처녀’의 작곡을 의뢰했던 원병의 씨가 제10대 수원시장으로 1971년 부임했다. 그는 ‘소양강처녀’처럼 수원을 대표하는 애창곡을 만들고 싶어 했다.

당시 문화공보실에서 근무했던 정광희 전 팔달구청장은 “노래를 만들어 다방, 요정 등에 무료로 나눠줬다. 그런데 히트를 못 쳤다”면서 “그래도 술집 여자들이 이 노래를 부르면 상당히 매력적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지난 1세기, 수원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되짚어봤다.

● 약탈경로로 쓰인 철도

수원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다른 도시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침체를 겪었다.

1895년 화성 유수부는 전국적인 행정개편 일환으로 수원부로 명칭이 바뀌었으며, 1896년 경기도 관찰부의 소재지가 됐다. 그러다 일제가 우리나라를 병탄한 1910년 경기도청 위치를 수원에서 서울로 옮기면서 수원면으로 바뀌었고 도시의 위상도 낮아졌다. 이후에도 일제는 몇 차례 대대적인 행정개편을 단행했다. 그때마다 수원은 면에서 읍으로, 읍에서 부로 바뀌었다. 해방 당시 수원은 경기도 수원군 수원읍으로 편성돼있었다.

1930년대 들어서면서 일제는 수원의 행정구역을 대대적으로 확대했다. 이 같은 변화는 수원에 철로가 개설됐기 때문이었다. 경부선이 놓이면서 수원은 중요한 통과지점이었다. 역사(驛舍)가 남문 밖 서쪽으로 나면서 남문은 수원시민의 생활터전으로 자리 잡게 됐다. 수인선과 수려선도 가설됐다. 수인선은 수원과 인천을 협궤철로로 잇고, 수려선은 수원과 여주를 연결했다. 외형상 수원의 도시시설이 발전하고 변화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수인선과 수려선은 경기지역 물산의 약탈경로로 쓰였다.

● 색다른 3·1 만세운동

수원지역의 3.1운동에 관해서는 향남에서 발생한 ‘제암리 학살사건’을 빼놓을 수 없다. 3.1운동에 대한 보복으로 일제는 1919년 4월 15일 제암리교회에 주민들을 모이게 해 무고한 주민들을 집단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한편, 1919년 3월 29일 색다른 시위가 수원시내에서 벌어졌다. 수원기생조합 회원 20여명이 경찰서 앞에서 만세를 부른 것이다. 당시 조선기생들은 일본인, 특히 왜경이나 왜헌병들에게 냉담하기 이를 데 없었다고 한다. 모두가 애국정신에 불타던 시대였다.

수원 기생부는 남문 위 남수리(현 남수동)였는데 명월, 향화, 도홍, 매화, 연화 등 20여명의 기생들이 있었다. 이들은 3월 29일 자혜병원(구 도립병원)으로 검사를 받으러 가다가 경찰서 앞에서 기생 중 김향화의 선창으로 일제히 만세를 불렀다. 그 후 병원에 가서 다시 만세를 불렀다. 이 일로 주동자 김향화는 공판에 회부돼 징역 6개월에 처해졌다.

기록에 따르면 수원 화류계는 1938년 크게 번창했다. 권번(기생들의 조합)의 기생수가 예년에 비해 20여명 증가해 50여명에 이르고 1년간 소비된 유흥비는 15만2천144원이나 됐다. 당시 소 한 마리가 80원이던 시절이다.

▲ 1920년대의 수원 성내 가옥 모습.

● 차별과 천시

일제강점기 수원주민들은 일본인들로부터 많은 차별과 천시를 받았다. 당시 명목상 수원군수는 한국인이었지만 경찰서장은 일본인이었다. 법원판사도 한국인이었지만 검사는 전부 일본인이었다. 법원의 감독서기 또한 전체가 일본사람이었다.

수원상공회의소 사무국장을 지낸 오상근 씨는 “요직은 전부 일본사람 차지였다. 당시 보통학교 월사금이 40전이었는데 그걸 못 내는 아이들이 허다했다”고 말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소먹이 풀을 베어놔야 해. 한 지게 해다가 소 있는데 부려놓고. 부지런히 세수하고 책 보따리 옆으로 짊어지고 학교로 뛰는 거예요. 학교에 가면 선생들이 교단에서 칼을 차고 있었다고.”

해방 전 수원 인구는 1만 2천 명 가량이었는데 일본인들은 2천명이 채 안 됐다. 일본인 고급관리들은 주로 서둔동에 모여 살았다. 권업모범장이 지금의 농촌진흥청으로 바뀌었고, 고등농림학교가 서울농대가 됐다.

● 수원비행장 건설

매산동 일대는 1910년 이후 만들어졌다. 거기에도 일본인들이 많이 살았다. 남문에서 역전으로 가는 길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일본인이었다. 쌀장사도 일본인들이 도맡아 했다. ‘이가와에’라는 정미소가 있었는데 한국인들은 잡일을 해야 했다. 키로 돌을 고르는 일은 한국 여자들이 다했다. 온종일 해봐야 30전을 받았다.

“그때 광교저수지나 광교시장에서 짐을 지게로 졌잖아. 그 지게로 한 짐이면 1~2전 했어. 30번을 져야 30전인데 그렇게 지면 사람이 죽어나지. 우리 학교 다닐 때 그렇게들 먹고살았어.” 오상근 씨의 증언이다. 1928년 수원에 시내버스가 첫 등장했다. 뒤이어 택시도 등장했다. 오상근 씨는 “경남택시가 3대인가 있었는데 불러야만 오니까 아무나 타는 게 아니었다”고 술회했다.

수원비행장도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졌다. 학생을 포함한 웬만한 수원주민들은 근로보국대로 비행장 건설에 동원됐다.

오상근 씨는 “서울에서 기차로 내려오다가 수원을 지날 때는 비행장 건설을 못 보게 하려고 차 안에서 그쪽 커튼을 전부 내리게 했다”고 말했다.

▲ 1919년 설립된 수원 우시장.

● 문밖장과 문안장

1919년 설립된 영동시장은 일제 때 문밖시장 또는 문밖장이라고 불렸다. 문안시장은 북수동에 있었다. 이 두 곳에는 한국인들이 시장을 형성했고, 매산 쪽에서 역전 쪽으로는 일본인들이 시장을 형성했다. 당시에는 북수동 문안시장이 더 컸다.

북수동에는 우시장도 있었다. 1960~70년대 문안시장은 규모가 축소됐고 상권은 문밖시장에 계속 형성됐다. 우시장도 차차 규모가 줄어들더니 1960년을 전후해 영화동으로 넘어갔다가 곡반정동으로 다시 옮겨가 더욱 쇠퇴했다.

문밖시장은 과거 수원읍사무소 자리에 있었다. 수원갈비로 유명한 화춘옥이 있었다. 지금은 양념갈비가 흔하지만 당시에는 값비싼 음식이었다.

오상근 씨는 “일제 때는 화춘옥도 건물이 따로 없어 장터바닥에 베 헝겊으로 차일을 크게 쳐서 나무때기에 목로처럼 앉아 술을 먹고 그랬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 참고문헌 ▲수원 근·현대사 증언 자료집Ⅰ,Ⅱ(수원시) ▲수원도시변천사(수원시) ▲우리 고장의 역사와 문화(수원시) ▲수원시사(수원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