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종의 문학잡설(147)] ‘먼 데 상류를 바라보고 있는 거북 한 마리’

김승종 / 시인 · 전 연성대 교수

 

1

거북이가 강기슭에서 올라와 산책로 한편을 뒷발로 파고 있다

무엇을 조심스레 묻으려 하시는가

이제 먼 데 별빛이 지상의 발걸음을 인도하던 시대로 돌아가려고 하시는가

사내 하나가 손전등을 켜고 거북이가 파는 땅을 비추고 있다

사내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밤의 균형이 무너질 듯해

긴장감을 이기지 못하고 휴대폰을 꺼내 생태 관리소로 전화를 건다

“여기 …… 거북이가 알을 낳으려 합니다”

 

잠시 후 트럭에서 내린 관리원이 삽을 들고 나타난다

삽에 얹힌 거북이는 다시 무심히 산책로 펜스 너머로 옮겨진다

사내는 손전등으로 여전히 거북이가 파던 땅을 비추어 본다

 

2

거센 비 그치고 산책로 쉼터에 앉아 강물을 바라본다

바로 아래 물살에 떠밀려 온 뿌리 뽑힌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둥둥 떠 있다

거기, 뒷발로 나무뿌리를 감싸고 의젓하게 앉아

먼 데 상류를 바라보고 있는 거북 한 마리

 

사내의 가슴을 별빛 하나가 꿰뚫고 지나갔다

       - 「구덩이와 나무뿌리」/박형준

 

 쉽게 잘 읽히지만 신중한 음미가 필요한 국면들이 있다고 여기면서 이 시를 다 읽은 독자들, 그 대목들로 돌아가기에 앞서 마지막 연(2부 2연) ‘사내의 가슴을 별빛 하나가 꿰뚫고 지나갔다’의 여운에서 ‘사내’와 자신이 어떤 심정이 될지 궁금할 것 같다. 동정의 존념인지, 공허한 허탈인지. 어느 쪽이든 그 직전 시행들에서 부각된 ‘거북’과 그 자태에서 연유되며, 서로 다르지만 ‘거북’의 자태에 저마다 어울린다고 하겠다. 

 전자는 ‘거센 비’ 이후 넘실거리는 ‘강물’의 ‘물살’에서도 ‘거북’이 ‘커다란 나무’의 ‘뽑힌’ ‘뿌리를’ ‘뒷발로’ ‘감싸고’ ‘의젓하게 앉아’ 있는 모습에서, 또 그런 와중에 ‘먼 데 상류를 바라보’는 유연하고 의연한 ‘거북’의 기상에서도 우리는 그렇게 느낄 수 있다. 후자도 역시 그러하다. 거북의 자태가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거센 비’ 이후 거센 ‘물살’에 ‘뿌리 뽑힌 커다란 나무’와 함께 ‘둥둥’ 띄워져 하류로 ‘떠밀려’ 표류하고 있는 ‘거북’의 무가내하 신세를 새삼 직시하며, 또 이 모습을 관망하는 작중 ‘사내의 가슴을’ ‘꿰뚫’고 사라지는 ‘별빛’과, 그리고 관통돼 구멍 뚫린 ‘사내의 가슴’을 떠올리며, 이 상태는 결국 상실과 좌절의 양상이 아니냐며 그렇게 느낄 수 있다.   

 그러다가 우리는 이 시를 다시 읽다가 관리원에 의해, ‘산책로’에 굳이 ‘알’을 ‘낳으려’고 하는 ‘거북’의 의지가 무산되는 장면에서 이번에는 보호가 아니라 배제되는 듯한 아이러니를 느끼고, ‘삽에 얹힌 거북이는 다시 무심히 산책로 펜스 너머로 옮겨진다’를 처음과 달리 ‘거북’의 그 염원이 구현되지 못하는 상황 완료가 아닌가 접근하며, 그러다가 아무래도 후자에 치중할 것 같다. 

 즉 1부 ‘거북’의 사정과 함축에 따라 2부 ‘거북’의 처지를 일관 이해해야 하겠다고 결정하기  쉬울 것이다. 또 그래야 1부 1, 2행의 묘사에 유관하게 이어졌지만 느닷없어 보였던 작중 화자의 토로, ‘이제 먼 데 별빛이 지상의 발걸음을 인도하던 시대로 돌아가려고 하시는가’와도 잘 부합된다. 우리는 이런 맥락을 종합하여 이 시의 메시지가 ‘별빛이 지상의 발걸음을 인도하던 시대로 돌아가지 못하는 지금 여기의 현실 부각’이겠다고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게오르크 루카치(1885-1971)의 이상향 지향과 그 과정에서 야기된 왜곡과 분열의 의식을 조정하는 총체성 확보[『소설의 이론』, 1917]에 연관된 이 메시지는 이미 우리의 지난 문학담론에서 자주 출현하였다. 하지만 산책하다 우연히 본, ‘강기슭에서 올라와 산책로 한편을 뒷발로 파고 있’는 ‘거북’에게 하필이면 ‘무엇을 조심스레 묻으려 하시는가’고 묻고, 루카치의 그 시선으로 연상을 전개하는 화자는 우리가 애초 이 시행들의 상호관계에서 느꼈던 것처럼 어색하지는 않다. 루카치를 떠나서도, 우리 전대에 그런 시대가 있었는지, 또 여러 차례 제출되었던 그 갈망이 제대로 성취된 적이 있었는지 여부도 떠나, 우리도 지금 더욱 ‘먼 데 별빛이 지상의 발걸음을 인도하던 시대’를 내심 그리워하고 있는지 모른다. 

 한편 이 시는 어니스트 헤밍웨이(1899-1961)의 단편소설 「킬리만자로의 눈」(1936)을 연상하게 한다. 루카치의 그 이상에 관련된 채 ‘알’을 낳으려하다 그러지 못하고 하류로 표류하고 마는 ‘거북’과, 만년설 정상에 오르지 못하고 마침내 그 아래 부근에서 얼어 죽어 박제된 ‘표범’은 이상을 추구하였으나 자신의 욕망과 세속의 이해에 매여 좌절하는 존재가 아닌가. 이런 해설이 수용될지 모르겠으나, 이 시의 메시지와 더불어 이 유감을 우리는 각각 나름대로 음미해서 나쁘지 않을 것이다.   

 이제 ‘사내’ 이야기를 할 차례. ‘사내’는 1부에서 보았듯, 작중 화자처럼 강변 ‘산책로’에서 산보하다가 ‘거북’이 그 길의 땅을 파는 정경을 보고 산보객들의 보행에 밟힐까 ‘손전등’으로 ‘비추고’, 또 ‘알’을 ‘산책로 펜스’ 너머에서 안전하게 낳게 하려고, ‘생태 관리소’에 연락하는  주선의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사내’는 그러고도 ‘손전등’으로 ‘거북’이 파던 땅을 비추’는데, 혹 ‘알’을 낳지 않았나 확인할 정도로 ‘거북’에게 남다른 정성을 기우린다. 

 하지만 2부에서 ‘사내’도 우리도 깨닫고 만다. 1부의 배려와 구조가 의도와 달리 ‘거북’의 그 소망을 무산시키고 말았다고. 그러니까 ‘거북’이 ‘산책로 한편’을 ‘뒷발로 파’ ‘조심스레 묻으려’ 했던 ‘무엇’은 자신의 ‘알’이며, 그것은 자신이 못 다한 이상이었다고 ‘사내’도 우리도 비로소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한 토막 더 추가. 이 시의 등장인물들인 ‘사내’와 화자는 다른 인물이 분명하지만, 2부 1연 1행, ‘거센 비 그치고 산책로 쉼터에 앉아 강물을 바라본다’에서 그 시선의 주체를 2부 2연 ‘사내의 가슴을 별빛 하나가 꿰뚫고 지나갔다’를 참조해 화자가 관찰하고 있는 1부 이래 그 ‘사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 관망 진술의 주체를 작중 화자로 여길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시는 화자가 자신을 ‘사내’라고 지칭하며 ‘거북’ 관련 사실과 사건의 추이를 짐짓 전개한 진술이다. 화자는 이 시의 아이러니와 유감과 자신이 무관하지 않다고 자처하고 있어 겸허한 성찰의 태도 또한 우리 음미의 대상이라고 할 것이다.    

 현실 사실이나 사건을 묘사하면서도 시대의 현실을 비유로 반영하는 알레고리 국면이 복합 개입된 시들은 대체로 독자들과 공유하고 있는 문제를 기본 상황으로 제시해 독자들이 무난하게 읽게 하고, 함축과 인유를 활용하고 독자들의 연상과 유추를 촉진하며, 문제 성찰을 권유한다. 그 환기되는 현실의 범주에 편향이 있고, 모종 이데올로기가 작용할 수 있는데, 이 시는 그 계선(界線)을 넘어서는 듯하다. ‘먼 데 상류를 바라보고 있는 거북 한 마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