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종의 문학잡설(148)] ‘관으로 된 긴 유리 터널’
얼굴은 밝아졌다 흐려졌다 다시 빛으로 점점이
얼룩진다
점멸하는 불빛 속으로 가속하는 밤
공기엔
한 방울 씩 새어 나오는 불안의 냄새가 섞여 있다
불을 붙이면 그대로 타오를 거야
마치 누군가가 내 가슴뼈를 두드리는 것 같아
참을 수 없어서 두 주먹으로 보닛을 두드리며 울던
너처럼
소리 지르며
아니 소리 지르듯 연주하는 음악을 들으며
길거리로 뛰쳐나가고 싶었어
대체로 우리에겐 함께 고통받을 사람이 없으니까
기뻐하겠다는 사람은 많겠지만
어둠에 근친한 것은 타고나는 일이야
큰 노력 없이도
사람들의 얼굴이 빛으로 물드는 것처럼
거의 다 빠져나왔다고 거짓말을 했지만
여전히 관으로 된 긴 유리 터널 속을 질주한다
결국엔
몇 바퀴 만에 제자리로 돌아올 걸 알면서도
잘못된 희망을 바라고 출발선에 웅크리는 게
내가 버리지 못한 결함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물체와 함께한다는 건
위안이지
세계를 종료하는 핸들을 손에 쥐고
빠르게 현재에서 벗어나는 느낌이랄까
해조차 뜨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다가
어느 한 구석에선
햇살 아래서 상처가 아물고 식물을 키우고
천천히 걷는 사람이 있어야지
하고
빛의 사람들을 용서한다
- 「Night Drive」/이원석
‘핸들을 손에 쥐고’ ‘세계를 종료’하려는 기세로 ‘현재에서 벗어나’려는 듯한 야간 질주, 산화 직전이라 할 화자의 이 가공할 모습에 우리 독자들뿐만 아니라 ‘너’, ‘참을 수 없어서 두 주먹으로 보닛을 두드리며 울던’ 화자의 친구도 긴장할 것이다. ‘불을 붙이면’, 아니 그러지 않아도 곧 폭발할 것 같은 ‘불안의 냄새’가 차 내부에서 팽창하고 있고, 과속으로 달리는 차는 그 기운을 도로에 마구 뿌리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화자의 이 행태에 아연 실망하면서 긴장만 거듭 하는지 궁금하다. 혹시 화자처럼 일종의 카타르시스도 느끼지 않을지. 무례하고 비열한 ‘누군가’가 더러운 손가락으로 ‘내 가슴뼈를 두드리는 것 같’아서 인내 끝에 분노하고 있는 화자를 곧 동정하거나 심지어 동일시하면서.
화자는 왜 이러나. 관련 사정을 조합해보면, ‘밤’이 오기 전에 화자는 ‘소리 지르며/아니 소리 지르듯 연주하는 음악을 들으며/길거리로 뛰쳐나가고 싶었’다. 그 까닭은 ‘대체로 우리에겐 함께 고통받을 사람이 없으니까’에서 알 수 있듯, 모종 ‘고통’과 동정 없는 소외 때문인데, 그것이 무엇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마 현실과 사회의 부조리에서 기인한다고 짐작할 수 있겠고, 화자의 근본 상태와 무관하지 않을 ‘관으로 된 긴 유리 터널’을 주목하게 된다. 이 ‘유리 터널’은 화자가 현재 전속으로 질주하고 있는 실제 터널이면서, 화자의 삶을 억압하는 사회 현실을 은유하는 매체로도 추정된다. 그리고 ‘관으로 된’ ‘유리 터널’에서 ‘관'이 '관(管 : 대롱)'이든 '관(棺 : 시신을 넣는 널)'이든 그러하다면 우리도 고통스럽게 한다. 전자라면 화자와 화자의 친구 ‘너’뿐만 아니라 우리도 ‘누군가’의 감시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고 할 수 있어 더 없이 불쾌하고, 또 구속과 다르지 않은 노출의 상태보다도 아무래도 여기서 벗어나지 못할 수 있다는 무기력한 낙담, 그러니까 ‘질주’해봐야 ‘여전히’ 통과하지 못하는 상태이기에 자해하는 심정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후자? 후자라면 더욱 그러하다. 자신과 자신의 삶이 살아 있지 않고 널 그 좁은 공간에서의 시신과 다르지 않다는 무참한 형편 인식 아닌가. 게다가 이 역시 ‘여전히’ 그 ‘속을 질주’하기만 하는 상태이고.
우리는 이런 제시가 과도하다고 의아해하기 앞서 화자의 다음 토로, 상기 문제가 전부가 아니라는 전환의 마지막 연을 읽으며 회의를 불식한다. 아니 우선 면제하며 화자를 신뢰할 수 있을 것이다. 화자는 낮지만 침착하게 말한다.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물체와 함께한다는 건’ ‘위안’이라고. 그러니까 심야의 자타 위험한 질주는 대낮의 ‘고통’에 지친 자신을 무마하는 조치이다. 이 언급이 없더라도 우리는 그렇게 추정할 수 있을 것이지만 화자가 직접 토로해서 우리도 위로된다. 화자는 또 ‘해조차 뜨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다가’ 그러다가 마침내 ‘어느 한 구석에선/햇살 아래서 상처가 아물고 식물을 키우고/천천히 걷는 사람이 있어야지’라고 마치 각성하듯 자신과 ‘너’에게 토로한다. 비록 광장이 아니라 ‘한 구석’에 불과하고, 또 자신과 ‘두 주먹으로 보닛을 두드리며 울던’ ‘너’도 그래야 한다고 촉구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복잡하고 미진한 심경을 화자는 ‘빛의 사람들을 용서한다’고 마무리해서 안도한다. 이 언급의 이면에는 자신도 ‘햇살 아래서 상처가 아물고 식물을 키우고/천천히 걷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의사가 잠재되어 있다고 감지할 수 있다. 중언되지만, 화자는 이미 ‘관으로 된 긴 유리 터널 속’ 심야 ‘질주’를 ‘위안’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우리는, 이 시의 최종 국면을, 앞의 ‘고통’에 관련된 ‘어둠에 근친한 것은 타고나는 일’과 대비되는, 빛에 ‘근친’하는 고통에서 연마된 심지(心志)라고 정리할 수 있으며, ‘대체로 우리에겐 함께 고통받을 사람이 없으니까’를 간과하지 못할 것이다. 최근 보도에서 4년제 대학을 졸업하고도 6개월 넘게 취업하지 못하는 청년들이 지난달에 3만 5000명이나 되고, 장기 실업자 수는 11만 9000명이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가 살펴야 할 이들이 어디 이 뿐이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