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길
강 희 동
그대를 위해 강을
하나 만들어요
이쪽과 저쪽을 가르는
강물 말고
섬으로 남겨진 외로운 덩어리도 말고요
물길 따라 함께 흐르는 강을 따라
길을 만드는 강의 길 말이에요
때로 물총새가 물을 스치듯 날아
가고 갈대가 바람으로 서걱이다
간혹 저녁노을이 삐져 얼굴 붉히며
러흘러흘 흘러 적막으로 빠지는
그런 강물의 길 말이에요
동과 서의 고금을 막론하고 시의 원형상징에서 흐르는 물은 가름이다. 강 이쪽과 저쪽 사이 넘을 수 없는 경계선이다. 그래서 물 이쪽을 차안(此岸) 이라 하고 저쪽을 피안(彼岸)이라 하지 않는가. 달리 말하면 사바와 열반을 달리 이름이다. 어쩌면 물 이쪽에서 사는 삶이 이승이고 저쪽에서 사는 시공이 ‘저 생’, 즉 저승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시인은 기존의 강이 지닌 상징을 넘어 ‘그대를 위해 강을/하나 만들어요’라며 이어 ‘이쪽과 저쪽을 가르는/강물’을 부정한다. 저 강이 그대와 나를 가르는 경계선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남은 이가 ‘섬으로 남겨진 외로운 덩어리’가 되어서는 안 되니 ‘물길 따라 함께 흐르는 강을 따라/길을 만드는 강의 길’을 만들자고 한다. 그 누구도 다시 넘어오지 못한, 그리고 나중에 가는 이가 먼저 간 사람과 함께 건널 수는 없는 강을 함께 흐르자고 한다.
그 강은 ‘때로 물총새가 물을 스치듯 날아/가고 갈대가 바람으로 서걱이’는 곳이다. ‘간혹 저녁노을이 삐져 얼굴 붉히며/러흘러흘 흘러 적막으로 빠지는’ 그런 강가이다. 조선진의 뱃사공 곽리자고가 그의 아내 여옥에게 들려주었다는, 공후인의 애절한 만류와 체념이 담긴 서러움이 오히려 강한 거부와 부정으로 더욱 애틋하게 가슴에 닿는다.
만난 자는 헤어지는 게 정해진 섭리라 해도 지극히 사랑하는 이를 강 건너 저쪽으로 먼저 보낸 아픔은 차마 감내하기가 어렵다. 나는 강희동 시인의 아픔을 조금은 안다. 그가 시집 『정숙한 목련』에서 연작으로 엮어낸 일련의 연작시들이 먼저 떠난 아내를 향해 부르는 비가(悲歌)라는 것도 안다.
아무리 삶과 죽음을 가르는 신의 저울이 공평하더라도 슬픈 건 슬픈 것이다. 그 아픔마저 부정할 수는 없다. 다만 그 눈물이 우리의 영혼을 정화하는 카타르시스의 샘이라고 감히 말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거듭되는 슬픔으로 우리의 영혼을 더욱 맑게 씻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지닌 눈물의 힘이다. 다형 김현승 시인도 ‘흠도 티도,/금가지 않은/나의 전체(全體)는 오직 이뿐’ 즉 눈물뿐이라 하지 않았는가.
초겨울의 하늘이 비둘기의 날개 빛깔로 낮게 내려앉더니 이어 저녁노을이 깔리고 있다. 차가운 생맥주보다는 따뜻하게 데운 청주 한 잔이 더 생각나는 시간이다. 가까이 있으면 불러내 진한 사투리에 얹힌 경상도 사내와 요즘 사는 얘기라도 한땀 한땀 엮어나가고 싶은 저녁이다.
강희동 시인
시집 『나 흔적이 되려 하네』
『금강송 이주촌』
『꼴』
『정숙한 목련』 등
율목문학상, 경기펜문학대상, 한국시학상 본상, 영랑문학상 대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