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종의 문학잡설(150)] ‘유모차 밀고/… 가는 길’

김승종 / 시인 · 전 연성대 교수

 

 학교의 교실에서 선생님으로부터 입은 사랑의 봄꽃 ‘향기’를 이후 내내 간직하고 기억하며 이웃에 베푸는 화자와 지난주에 조우하여 우리도 그 ‘향기’로 훈훈했다. 선후 인과의 아름다운 그 정경은 언젠가부터 야기되고 있는 교권침해 아니 교육훼손 각종 비리들과 대비되면서, 오늘 우리가 교실과 교사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도 새삼 우리에게 질문한다. 세계의 구조와 시대의 변화를 전제로 교사들을 싸잡아 은근히 일반 서비스 업종 종사자로 취급하고, 내 새끼를 우선하며 성적 향상의 도구로 삼는 시선을 지양하지 않는다면, 클라우드 데이터베이스 구축과 AI 활용이 본격화되면서 결국 학교무용론이 강력하게 제기될 것이다. 벌써부터 호사가들의 대학 무용론부터 그 고개를 쳐들고 있다. 교육자를 존중하지 않는다면 지식 전수의 구체 효율뿐만 아니라 인격과 인격의 소통과, 감화의 이심전심(以心傳心)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더 이상 내 ‘마음에 스민 향기’를 운운하거나 음미하기 어렵고, ‘어느 먼 기억을 안고 오는 이’에 관련된 휴머니즘 사은(謝恩)의 조촐한 자기고양을 촉진하는 각성도 있기 어려울 것이다.      

 만학의 행복을 넘치듯 표출하는 다음 시에서도 우리는 교실과 교사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한다. 

 

공부 한 자 한 자 

알아가는 기쁨에

나는 좋다

공부하는 동안에는

잡념도 없어지고

글자만 눈에 들어오네

유모차 밀고

마을회관 가는 길이

나의 꽃길이다

  - 「학교 가면 좋다」/김미자

 

 이 시에서 토로되는 ‘알아가는 기쁨’은 그 도래 이전 이후에 ‘마을회관’의 〈한글 교실〉과 교사를 기본으로 하고 있고, 또 교사와의 모종 유다른 이심전심(以心傳心)이 있기에, 그래서 가능한 발양이라고 직감할 수 있다. 실제로 이 시는 〈찾아가는 부여한글학교〉가 파견한 강사와 그 학교의 〈초촌면 응평 2리 마을회관 교실〉에서의 공부를 기초로 하고 있다. 이 둘이 없었다면 여러 사정으로 한글을 익히지 못했던 시인(86세)이 한글을 공부할 수 있는 기회에 직면하기 어려웠을 것이고, 지속도 어려웠을 것이다. 한글을 읽고 쓰는 앎의 열락(悅樂)을 자각하고 향유하기도 무망(無望)했을 것이고, 또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생각과 정서를 자기류의 언어로 세상에 현시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이 시에서 주목해야 할 둘째 국면은 시인이 한글 공부로 자각하게 된 앎의 열락이 어느덧 자율과 자족의 맥박으로 생동하는 국면이다. 행간의 사정을 연상해보지 않아도 ‘마을회관’의 〈한글교실〉로 아침에 ‘유모차’를 ‘밀고’ ‘가는’ 시인의 모습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유모차’에 굽은 허리를 의지하여 보행하는 노년의 모습. 어느 시인의 권유대로 이 정경을 자세히 본다면, ‘유모차’를 미는 것이 아니라 새 세계로 자신을 미는 형국이 분명하다. 즉, 저 ‘알아가는 기쁨’이 융기되는 〈한글교실〉로 가는 방향으로 하여, 단순한 물리 차원의 이행이 아니라 새 차원으로 진입해가는 존재 이월의 행보가 아니겠는가. 

 더욱이 ‘잡념’ 절연, 무상무념의 경지에서 차오르는 ‘알아가는 기쁨’, 신선하고 화평한 그 전율은 마음과 몸을 거듭 거듭 쇄신하리. 이 열락은 바로 공자의 “배우고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와 취지가 같고, 교환가치나 사용가치와도 무관한, 존재 계명(啓明)을 자각하는 탄성 역시 포함되어 있다. 이 ‘알아가는 기쁨’은 그러고 보니 성인(聖人) 공자만이 아니라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범인들도 이미 깨닫고 향유했던 인간 보편의, 생래 천부의 ‘기쁨’이었다는 자각을 문득 하게 된다. 

 한편 이 시를 다시 읽으며 우리는 또 공자의 유명한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 夕死 可矣)”는 언급마저 연관 상기할 수도 있다. 진리야말로 생명이 가장 높게 추구해야할 대상이라는 이 메시지에는, 실천은 물론 우선 그 인식에서 ‘알아가는 기쁨’을 향유할 수 있다는 기대 또한 내포되어 있다고 하겠다. 

 굽은 허리로 유모차를 겨우 밀고 밀어 학교의 교실로 가는 시인의 모습은 비유와 상징의 시선을 떠나서도 우리에게 감명을 선사한다. 노년의 그 모습은 정작, 1940년 전후에 이 땅에 태어난 시인의 세대가 운명으로 겪어야만 했던 여러 고난과 막막한 그 결핍, 유감스러운 그 길고 긴 여운을 이제 해 뜬 아침의 시간에 마침내 극복하며 그 승화의 자기완성 길을 가는 정경이 아닌가. 우리는 이 모습을 그저 아름답게만 보며 그치기는 어렵다. 손쉬운 체념과 설익은 나태에 익숙해져 유종의 결말 맺기를 기피하며 방황하는 듯한 일부 ‘잡념’ 많은 후배들을 반성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