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기의 '수원 詩, 수원 詩人(84)] 이정순 '폭설'

김준기 수원시인협회 회장

 

폭설

                         이 정 순

 

흔들리는 그녀가 온다

허스키한 그녀가 온다

무희의 춤을 빌려 온다

외로워진 마음 끌어안고 

붉은 알전등 아래 온다

 

첫사랑도 왔으면 좋겠다

꽃같던 시절도 왔으면 좋겠다

천지간 구분 못할 웃음으로

 

아니

아니

폭설은 오지 않을 것이다

오지 않을 것을 나는 안다

 

멜랑꼴리한 여가수의 샹송이 끝나면

저 눈발처럼

희미한 옛사랑도 그칠 것이므로

 

당신이 가버린 지금 온다

 

시 속에서는 눈이 내린다. 폭설이다. 하지만 실제로 내리는 눈이라기보다는 마음속에 쌓이는 눈이다. 어쩌면 시인은 방에 홀로 앉아 따뜻한 차를 마시며 아다모 원곡 ‘눈이 내리네[Tombe La Neige]’를 리바이벌한 노래를 듣고 있을 수도 있다.

노래에 취해 가만히 듣는다. ‘흔들리는 그녀가 온다/허스키한 그녀가 온다/무희의 춤을 빌려 온다/외로워진 마음 끌어안고/붉은 알전등 아래 온다’ 시 속의 ‘그녀’는 내리는 눈의 의인화일 수도 있고 흘러나오는 노래일 수도 있다. 내리는 눈은 흔들리며 오신다. ‘허스키한 그녀’이다. 여가수의 허스키한 ‘눈이 내리네’ 노랫소리가 방 안을 가득 메운다. 결코 빠르지 않은, 그러나 뻐근하게 가슴을 누르는 춤으로 마음속에 눈이 내린다. 노랫말처럼 외로워진 마음 끌어안고 내린다. 

그 시절이 분명 있었다. 함박눈과 더불어 ‘첫사랑도 왔으면 좋겠다/꽃같던 시절도 왔으면 좋겠다’ 그것도 기왕이면 건곤일색으로 폭설이 내리는 밤이면 하늘과 땅을 구분 못하는 것처럼 ‘천지간 구분 못할 웃음으로’ 왔으면 좋겠다.

그러나 그 시간은 다시 오지 않는다. 시인은 ‘아니/아니’라고 행을 바꾸어가면서까지 ‘폭설은 오지 않을 것이’라고 부정한다. ‘오지 않을 것을 나는 안다’고한다. 여기서 가슴이 아프다. 인제는 그 기억조차 희미한 잔상으로 남은 ‘옛사랑’이지만 가만 눈을 감으면 여전히 가슴 두근거리는 그 사랑. 그러나 다시는 오지 않을. 눈이 내리는 동안 설레어 보지만 ‘멜랑꼴리한 여가수의 샹송이 끝나면’ 더는 눈도 내리지 않고 ‘희미한 옛사랑도 그’치는, 눈에 젖은 듯한 슬픔을 지나온 날들 속에서 충분히 맛보았으므로. ‘아니/아니/폭설은 오지 않’는다고 고개를 젓는 것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노랫말처럼 그 폭설이 ‘당신이 가버린 지금’ 온다. 

올겨울도 벌써 첫눈부터 장하게 함박눈이 내리셨다. 아무리 춥고 길이 미끄러워 불편하더라도 여전히 폭설은 우리의 추억을 불러내는 쪽으로 더 강하게 작용한다. 오늘 밤 눈이 온다는 일기예보는 없다. 그래도 커피 한잔을 마셔야겠다. 묵은 LP를 다시 뒤적여야지. 마침 내게 이 노래가 들은 판이 몇 장 있다. 김추자보다는 이미배의 노래로 들어야겠다.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허스키하고 멜랑꼴리한 음색으로 부르는 노래를 들으며 저녁 시간을 보내야겠다.

당신이 가버린 지금 눈이 온다

 

 

이 정 순 시인

2006년 《문학시대》로 등단

시집 '아버지의 휠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