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월요일 내 오랜 벗 최영선 시인의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최영선 시인은 수원북중학교, 수성고등학교 동창으로 수원시인협회 회장을 지냈고 지금은 명예회장으로 봉사하고 있다. 중학교 때는 서로 잘 알지 못했지만 고등학교에서 문예반 활동을 함께 하면서 인연이 돼 지금까지 우직한 우정을 이어오고 있다.
당시 내가 살던 곳은 화성군 봉담면 수영리였다. 군 입대 전 수원에서 술을 마시다 통금이 임박해지면 매산동에 있는 그의 집 문을 두드리곤 했다. 그런 다음날이면 그의 어머니가 검은 콩이 섞인 쌀밥에다 청국장찌개, 김구이, 멸치볶음 등 내 입맛에 맞는 반찬을 정갈하게 차려 주셨다. 결코 부유한 형편이 아니었음에도.
나는 그냥 그 집 식구나 다름없었다.
세월이 흐르고 나의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문득 밥을 챙겨 주시던 그의 어머니가 생각났다. ‘아, 내가 너무 무심했구나’, 반성하며 몇 번 모셔서 식사를 함께 했다. 좋아하시는 모습을 보며 송구스러웠다.
그 어머니가 위독하시다는 말을 전해 듣고 곧바로 최 시인에게 전화해 문병을 가기로 했다. 다음날 오전 만날 장소를 물었다.
하지만 그의 대답은 “그냥 연화장으로 와”라는 것이었다. 늦었다. 며칠 전 함께 가서 뵈었어야하는 건데...이렇게 빨리 가실 줄은 몰랐다.
장례식장에서 만난 그는 아직 어머니의 부재를 실감하지 못하는 듯 했다. 나도 그랬다. 어머니 상을 치른 후에야 심장이 베어지고 하늘이 무너지는 그야말로 ‘천붕지통’(天崩之痛)이 시작됐다. 자네도 그럴 것이다.
3일장 기간 동안 그의 옆에 머물면서 발인과 화장까지 지켰다.
‘그저/그저/밝은 빛만 따라가시라/사랑하는/나의 어머니’라고 써서 영전에 놓아드렸다.
최영선 시인은 전기한 것처럼 내 인생 벗이며 문우다.
수성고등학교 문예반원들이 중심이 된 문학동인회 ‘야생초’를 함께 출범시켰다.
그때 수원지역 대표 백일장이 열렸던 ‘화홍문화제’에서 1년씩 교대로 장원을 차지했다.
전국 백일장과 공모전에서도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나는 대학교에서 실시하는 전국백일장 몇 군데에서 입상했고 학원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는 경희대학교 전국 고교백일장에서 영예의 장원을 차지하기도 했다. 당시 심사위원장이었던 조병화 시인은 그의 장원 작품 ‘소리’를 “당장 신춘문예에 내도 당선될 만한 작품”이라고 극찬했다.
동인운동도 함께 했다. 내가 이끌었던 ‘시림’ 초창기 동인, 고등학교 1년 후배인 김준기 시인이 주도했던 ‘무풍지대’ 동인으로 활동 했다.
그가 혼인하고 호구지책으로 서울에서 사업을 시작한 이후 한동안 자주 만나지 못했다. 그러다가 사업을 접고 다시 수원에서 기자생활을 하면서 수시로 만났다.
앞에서 밝힌 것처럼 수원시인협회 회장도 오랫동안 맡아 이끌었다. 경기시인협회나 수원시인협회 행사를 할 때 나타나지 않으면 일의 진척이 되지 않을 정도로 헌신적인 사람, 그가 최영선이다.
그는 ‘출천지효’(出天之孝)라고 해도 될 만큼 부모님을 정성으로 모신 효자다. 부모님을 위해 별도로 집을 얻어 함께 살 정도로 효심이 지극했다. 거동이 불편하신 부모님의 병 수발은 물론 음식까지 직접 만들어 차려드리고 했다.
부모님을 봉양 하느라 자신을 돌보지 못해 큰 병을 얻은 적도 있었으나 ‘효심에 감동한 하늘의 도움’(나는 그렇게 생각한다)으로 이겨냈다.
그러니 이번에 어머니를 보내드리고 나서 상심이 얼마나 클지 상상할 수 있다.
‘하송’(河松)이란 호는 내가 지어 주었다. 맑은 물이 흐르는 내를 바라보고 있는 품이 넉넉한 소나무 같다는 뜻이다. ‘헐렝이’ 또한 내가 지은 별명이다. 자신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주변을 돕기 때문이다. 나도 아내가 아파서 급히 차량이 필요한 한밤중에 그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다. 나는 자동차 면허가 없다.
최 시인은 문학적 동료이기도 하지만 인생의 둘도 없는 벗이다.
얼마 전 김준기 수원시인협회 회장은 수원일보 11월 13일자 ‘김준기의 수원 詩, 수원 詩人’에서 최영선 시인의 ‘2014 종로에서’라는 시를 소개했다.
‘해거름에/취재를 핑계로/한 잔 술 하던 날/마음 많이 아픈 친구놈을 만났다//소주와 생맥주/그리고 통닭 한 마리/그가 말 한다/어금니 없어서 고기는 못 먹겠노라고/그래도 친구는 요즘 행복하단다/이제는/이 악물고/살지 않아도 되어서…//어느새 삭아서 구멍이 난/내 어금니 하나/11월 어둠 속의 눈발처럼 부서지고/그의 눈에서/이미 말라버린 눈물이/이제 내 가슴 속을 흐른다’(하략)
‘해거름에 취재를 핑계로 한 잔 술 하던 날’에 만난 ‘마음 많이 아픈 친구놈’은 바로 나다.(나에게 ‘친구놈’이라고 할 수 있는 ‘놈’은 최영선 밖에 없다.) 당시 금전 문제로 많이 심란해 하던 시기였다.
그 역시 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오래된 연식의 자동차 연료비를 걱정하던 때였으니.
2014년, 60살 가까운 가난한 중늙은이 시인 둘이 종로 골목에서 통닭 한 마리를 놓고 신세한탄을 했을 것이다.
김준기 시인은 이 글에서 “그래도 시의 길을 함께 걷는 도반 하나는 얻지 않았는가. 게다가 ‘호놈’을 할 수 있는 막역한 친구를”이라며 우리를 위로하고 있다.
고맙다. 가진 것은 없지만 그래도 마음속에 있는 말을 터놓고 꺼낼 수 있는 벗이 반세기 넘게 내 곁에 있다는 것이.
아무 때나 전화해도 “왜?”라고 묻지도 않고 곧장 달려오는 내 친구 최영선.
자네나 나나 건강 조심해서 앞으로 더욱 자주 자주 얼굴이라도 보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