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종의 문학잡설(151)] ‘종종 자는 척을 하는 떫은맛의 엄마를 뱉어내요’

김승종 / 시인 · 전 연성대 교수

 

 인간의 생노병사(生老病死)는 도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이 숙명에서 다행이라면 성장과 성숙을 포함한 노(老)와 그 전후 과정이 길다는 국면이다. 인간의 삶은 그래서 의미를 가질 수 있고 후세에 자손을 남기기도 하며 덧없기도 한 유구 역사에서 어떤 영욕의 존재가 되기도 한다. 이 모두 부모나 우리나 같은 처지이지만, 어머니의 막심한 산고(産苦)와 아버지 어머니의 신산한 구로지은(劬勞之恩)에 의거한다.   

 그래서 사망이 예고되는 부모의 말년 병고에 직면한 가족의 상황은 단순하지 않다. 요양원 입소나 요양병원 입원 상태에서도 마찬가지. 이미 겪은 가족은 그 상황을 떠올리기를 기피하려 하겠지만 종종 몇몇 장면이 의지와 무관하게 떠올라 억제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 관련된 문제를 다루며 다음 시의 화자는 한마디로 ‘주관식’이라고 한다. 

 

착한 돌봄은 주관식이에요

 

겁 없이 뛰어내리다 연민과 희생 중간쯤에 머리가 끼었어요

장애 등급 선 하나가 그어졌을 뿐인데

서로를 끌어안은 채 맨홀 속으로 미끄러지고

냉담한 살, 따뜻한 피가 서로 부딪치며

팽팽한 질감의 맨살 냄새가 깊어져요

같은 시간에 반복되는 강아지 산책은 패스를 외치고

배경처럼 서 있는 엄마는 점점 구석을 닮아가고

심장에 가까울수록 사람이 없네요

기도와 기억으로 뒤섞인 감정들은 서로를 정리 중이고

미안해, 고마워, 잘 관리되는 식물들마다

겉도는 억양에선 통증이 묻어나고

종종 자는 척을 하는 떫은맛의 엄마를 뱉어내요

맨얼굴을 들켜버린 약점을 가족이라 부르는 

엄마의 착한 걱정은 지의류

눈물 없이도 잘 자라거든요

         - 「가족들의 방」/고영숙

 

 ‘착한 돌봄은 주관식’이란 화자의 첫 토로가 무슨 뜻인지 우리는 이후 맥락에서는 물론, 직후 2연 첫 세 행에 국한해서도 잘 알 수 있고, 대번 복잡해진다. 특히 ‘겁 없이 뛰어내리다 연민과 희생 중간쯤에 머리가 끼었어요’에서 우리는 이 진술을, 화자와 화자의 남매가 ‘엄마’가 무거운 병환으로 앓자 구료에 나섰다가 ‘연민과 희생’ 사이에서 힘들어하며, 엄마와, 자기 자신과의 갈등으로 교착된 상태를 알리는 언급으로 알면서, ‘연민’은 병고의 ‘엄마’를 동정하는 가족의 심정이라서 공감하지만, ‘희생’이란 표출은 어색하게 여길 것이다. ‘엄마’를 위한 자신의 ‘돌봄’을 바라보는 가족 자신의 시각, 즉 자신의 ‘돌봄’이 힘들어 과중으로 이행되었다고 느끼거나 생활의 다른 가치를 과도하게 배제하고 있다고 여기는 심사가 내포되어 있기에. 

 우리는 그런데 화자와 화자의 가족을 비난하지는 않을 것 같다. 불편해하면서도 동정하게 될지 모른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속담을 새삼 떠올리며, 그들의 간병과 기타 노고에 짐짓 치중하며 ‘희생’ 운운을 희석해 수용하고, 나아가 ‘엄마’의 병환을 돌이키기 어렵다면 이제 산 자가 자신의 건강을 염려해야 하고, 아직 자신의 ‘돌봄’이 필요한 자신의 자식들에게 에너지를 활용하는 편이 더 좋겠다, 아니 이는 그대 ‘엄마’의 뜻이기도 할 것이다, 하며 화자 남매를 위로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이 시는 그 이후, 우리가 읽은 대로 우리의 동정과 달리 우리를 더욱 불편하게 한다. 간병하는 가족과 간병 받는 ‘엄마’를, ‘서로를 끌어안은 채 맨홀 속으로 미끄러’졌다고 하고, 나아가 ‘냉담한 살, 따뜻한 피가 서로 부딪’친다고 하다니. 심지어 ‘팽팽한 질감의 맨살 냄새가 깊어’진다고 한다. 우리는 말뜻도 말뜻이지만 이 시행의 어조가 자조인지 야유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파악하기 애매하며, 아무리 앞에서 화자가 이 상황을 객관식이 아니라 ‘주관식’ 문제라고 강조했지만, 우리 자신과 가족도 혹 그럴 수 있다는 개연성에 얼굴 붉어질지 모른다. 이어지는, 간병 때문에 즐기던 ‘강아지 산책’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유감과, 자신의 삶에서 ‘배경’이던 ‘엄마’가 간호로 하여 ‘점점 구석을 닮아가고’ 있다는 역설, 자신을 포함한 가족의 은폐된 기미 노출에 우리는 어째 자신에게 당황해할지 모르겠다. 고소(苦笑)할지도 모르겠다.

 혈친 관계를 충일하게 하는 정서이자 의리의 행동이기도 한 효행보다 개체 개인의 사정과 편리 추구가 이런저런 명목으로 우선되는 시대지만 우리는 인간의 한계와 미흡을 이 기회에 또 본다. ‘심장에 가까울수록 사람이 없네요’... 

 적나라한 그 고언에서도 화자는 아예 작심한 듯 더 나아간다. 자식들의 ‘미안해, 고마워’란 그 ‘겉도는 억양’의 말을 엄마는 ‘종종 자는 척’, 즉 못들은 척하며 불응하는데, 자식들은 그런 딱한 ‘엄마’를 자신의 형편을 수용하지 않는 모습이라 여기고, 서운하다며 ‘뱉어’낸다고. 

 차라리 이대로 시가 종결되었으면 하고 바랐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이 지경까지 모두 염두에 두고 이 시의 결미, ‘맨얼굴을 들켜버린 약점을 가족이라 부르는/엄마의 착한 걱정은 지의류/눈물 없이도 잘 자라거든요’를 더 잘 헤아려야 할 것이다. 자식들의 이 한심한 노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슬퍼하지 않고 묵묵히 혜량하며, 우리는 ‘가족’이라고 오히려 무마하는 ‘착한 걱정’을 하는 ‘엄마’. 이 배려와 용서야말로 ‘희생’이라 할 수 있고, 췌언이지만 이 ‘희생’은 무상이다. 참고로 ‘지의류’는 조류(藻類) 뿐만 아니라 균류(菌類)가 있어 나무껍질이나 바위 같은 척박한 곳에서 일체로 상보 상생하는 은화식물(隱花植物)이다. 자식의 진정한 ‘눈물’이 없어도 천부로 자생하는 ‘엄마의 착한 걱정’은 우리에게 익숙한 모성의 자정(慈情)이지만 우리가 위 시행들에서 살핀 자식들의 면모는 구차한 이기를 자각하지 못한 표출일 수도 있지만 그럴수록 더 가증스런 이기의 내로남불과도 다름없다. 

 이 시에서 화자는 솔직할 뿐만 아니라 진정성에 분발하는 용기가 일품이다. 할 말을 다한 것 같기도 한데, 그래도 절제한 말이 있다고 여겨져 필자가 ‘주관식’으로 부연해보려 한다. 내리사랑이 치사랑보다 더한 것은 자연의 이치라고 하는데, 동물에서 진화한 인간 인격의 한계이자 생리라는 지적이지, 그렇다고 해서 이 ‘약점’을 당연하다는 듯 어쩔 수 없다는 명분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부모의 사랑을 상기하며 그 사랑만큼은 안 되더라도, 어떻게 해도 결국 미치지는 못 하겠지만, 다만 부끄럽지는 않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 누구보다도 자신에게. 못난 자식을 위해 ‘종종 자는 척을 하는’ ‘엄마’의 심정을 제대로 헤아리며, 최소한 그 심정을 ‘주관식’으로 ‘뱉어내’지는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