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기의 '수원 詩, 수원 詩人(85)] 이춘전 '겨울산'
겨울산
이춘전
엎드려 숨고른다
나날이 벅차던 꿈
적멸을 견뎌내는
발밑은 수묵화빛
능선은 칼바람에
느낌표로 일어서다
겨울 산이다. 몇 날 몇 밤을 눈이 내리다 그치곤 다시 내렸다. 더러는 녹아도 그냥 속절없이 쌓이기만 하는 눈을 겨울 산은 넉넉히 받아들일 것이다. 소나무나 잣나무 몇 그루는 여전히 푸른 바늘 끝을 세우고 섰지만, 대부분 나무들은 앙상한 가지를 한겨울 높바람에 밭긴 채 떨고 있다. 그렇다고 생명을 향한 저들의 꿈마저 소멸한 것은 아니다. 꽃을 피웠던 봄과 한여름 신록의 ‘나날이 벅차던 꿈’을 그전 한겨울 ‘엎드려 숨’을 고를 뿐이다. 다만, 다만 그렇다.
하지만 정녕 적멸인가. 인세의 모든 번뇌를 끊어내고 더 이상 미혹한 삶과 죽음의 인과를 되풀이하지 않는 경계이다. 그 자리에 겨울 산은 흔들리지 않고 그 ‘적멸을 견뎌’내고 있다. 다양한 빛깔의 분별과 다툼이 사라진 산의 ‘발밑은’ 온통 ‘수묵화빛’ 오직 하나의 빛깔로만 자리 잡고 있다.
무문관 토굴에 든 학승이 십 년 면벽으로 화두를 좇아도 한소식을 하는 순간은 그야말로 찰나라고 한다. 모든 일렁임이 적멸에 드는 겨울 산의 ‘능선’에서 ‘칼바람에/느낌표로 일어서’는 깨달음이다.
지난해 겨울이었다. 필름을 구하러 충무로에를 나갔다. 수원에서는 흑백 필름을 도저히 구할 수가 없었다. 모든 사진 작업이 디지털로 바뀌다시피 한 까닭이다. 필름을 판매하는 곳도 드물지만 왜 그렇게 가격이 올랐는지 헐렁한 지갑으로는 감당하기가 벅찼다. 아무튼 겨우 몇 통을 구한 다음 추위도 녹일 겸 찻집을 찾았다. 그런데 그곳의 여주인은 손님은 뒷전이고 산행의 행장을 꾸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저녁에 출발하여 다음 날 아침 소백산을 찾을 계획이라는 것이다. 그래, 왜 하필이면 이리 추운 겨울날 산엘 가냐고 물었더니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더니 한마디 툭 던졌다.
따뜻한 곳에 살다가 따뜻한 옷 입고 찾아간 내가 추우면 그곳에 우두커니 앉아서 나를 기다리는 산은 얼마나 더 춥겠수,
그야말로 우문에 현답이었다. 마치 둔기로 뒤통수를 한 대 되게 얻어맞은 듯 한순간 멍해졌다. 여주인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여전히 짐 꾸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날의 그 기분 좋은 충격을 이춘전 시인이 보내준 시 한 편으로 다시 맛보는 저녁이다. 아직은 좀 이른가. 산사의 스님들은 물론 상수리나무 아래 다람쥐, 겨울 산을 지키던 텃새들까지도 모두 동안거에 들었으리라. 그래도 아직은 겨울이 한참 더 깊어질 날만 남았다. 산 아래 수묵화 빛은 더욱 짙어질 것이다.
이춘전 시인
《한국시학》 신인상
《시인마을》 동인
홍익대학교 교육대학원 국어교육 전공 졸업
수원공업고등학교 교사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