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기의 '수원 詩, 수원 詩人(87)] 임병호 '겨울 강가에서 봄을 만나다'

김준기 수원시인협회 회장

 

겨울 강가에서 봄을 만나다

                          임 병 호

 

동지(冬至) 흘러간 겨울 강가에서 바라보면

산간마을 나무들 눈빛이 따스하다

풀뿌리 적시는 연록색 물소리 들린다.

 

하루하루 낮이 길어지면서

보리들이 푸르게 얼굴을 들고

냉이, 씀바귀, 달래는 귀엣말을 나눈다.

 

숲속을 나온 작은 멧새들

여기로 저기로 나비처럼 날며

은방울 흔든다. 콧노래 부른다.

 

농부는 식솔들과 도란도란

잘 생긴 씨앗들을 고르며

흙이 살찌는 내일을 가슴에 품는다.

 

소한(小寒), 대한(大寒) 강 건너 있지만

언 땅 속에서도 새싹들이 움트듯

새 생명들이 산천초목에서 꿈틀거린다.

 

추억을 남기고 떠나가는 세월 곁에서

의식의 영혼 청청(靑靑)히 일깨워 준

유정한 겨울이여 고맙다.

 

한때 북새풍(北塞風)으로 시름 깊었으나

봄날의 부활을 위하여

뒤돌아서서 붉은 눈물 씻었다.

 

설원(雪原) 맨 처음 걸어온 발자국 돌아보면

오늘 출발이 더욱 새롭다. 경건하다.

잉태한 꿈 탄생을 위하여 가는 길 아름답다.

 

긴 어둠 끝에서 뜨겁게 떠오른 새해 아침,

황소 앞세우고 들녘으로 나가는 농부의 발걸음

힘차다. 바람도 싱그럽다. 까치들이 따라간다.

 

이 시는 임병호 시인이 2010년 가을에 펴낸 시인의 열네 번째 시집 『겨울 강가에서 봄을 만나다』의 표제시이다.

‘동지(冬至) 흘러간 겨울 강가에서 바라보면/산간마을 나무들 눈빛이 따스하다/풀뿌리 적시는 연록색 물소리 들린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동지가 지나야 새해가 온다. 동지섣달의 혹한 속에서 우리는 한 해를 보내고 또 한 해를 맞이한다. 시인은 칼바람이 뼛속까지 스미는 겨울 강가에 서서 얼음장 밑으로 흐르며 생명의 뿌리를 적셔주는 물소리를 듣는다. 아직 천지는 눈에 덮여 흑과 백으로 나뉜 구도 속에서 무채색으로 군림하지만 시인은 ‘연록색 물소리’를 듣는다. 새 생명의 소리를 듣고 있다. ‘보리들이 푸르게 얼굴을 들고/냉이, 씀바귀, 달래는 귀엣말을 나’누는 소리를 듣고 있다. 

아직 ‘소한(小寒), 대한(大寒) 강 건너 있’는 한겨울이지만 시인은 그 강가에서 ‘언 땅 속에서도 새싹들이 움트’는 봄을 만났다. 돌이켜 보면 지난 한해도 ‘북새풍(北塞風)으로 시름 깊었’던 날이 더 많았다. 그러나 ‘긴 어둠 끝에서 뜨겁게 떠오른 새해 아침’이다. ‘잉태한 꿈 탄생을 위하여 가는 길’을 위하여 새해를 경건하게 맞을 일이다. 

임병호 시인이 첫 시집 『환생(幻生)』을 상재했던 해가 1975년이다. 벌써 반세기 전의 일이다. 당시 황무지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닌 수원 문단에 《화홍시단》의 깃대를 세운 일은 1964년이니 그보다도 훨씬 이전의 일이다. 수양산 그늘이 강동 팔십 리를 간다고 했다. 인척 관계의 덕을 본다는 관용적 표현으로 쓰이지만 다른 뜻으로 새겨 보자. 강동의 아름다운 산하는 수양산 그늘이 있었기에 이루어질 수 있었다. 오늘날 수원 시단이 하나의 숲을 이루어 새해 아침을 맞아 봄을 기다림도 선배제현들이 먼저 험난한 길도 마다하지 않고 걸어온 덕이다. 아울러 그 길을 이어 헤쳐갈 도반(道伴)들의 건강과 건필을 기원한다는 뜻을 이 지면을 빌려 전한다.

 

 

임병호 시인

한국경기시인협회 이사장. 

시문예지 《한국시학》 발행인.

수원문학아카데미 원장.

시집 『환생』(1975년) 이후 

     『석양의 뒷모습』(2025년. 조병기 허형만 임병호 정순영 합동시집) 등 29권.

제1회 한국문인상, 한국예술문화상 문학부문 대상, 한국문학비평가협회상 외 다수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