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종의 문학잡설(154)] ‘첫사랑 그녀를 만나게 된다’
1
병원에서 나와 동물원에 갔다
사람들은 호랑이와 사자 우리 주변을 서성이지만,
나는 초식성
잎이 넓은 나무 사이로 자꾸 눈이 간다
가느다란 가지에 까만 눈동자
미동도 없이
말간 하늘을 담고 있다
눈망울에
출렁이는 바다를 담고 있다
라마르크란 사람은
기린이 아카시아 잎을 뜯다가
저렇게 목이 길어졌다고 말했지
아니야 나를 보는 저 눈을 봐
기린은 기다리다가 목이 길어진 거야
2
정형외과에서는 일자목이라고 나더러 하였지
하지만 나는 기린을 닮으려면 아직 멀었지
그리움은 저 목 위
어딘가까지 이어져 있을 테니
3
목을 엇갈려 대며 서로 사랑을 표시하는 기린
술래를 뽑으려 사다리를 타면
누군가는 반드시 당첨되곤 했지
저 목을 타고 오르면
착하게 생긴 얼굴과 만나게 된다
긴 혀를 가진 순한 짐승
첫사랑 그녀를 만나게 된다
- 「기린은 기다린다」/고광이
‘1’의 3행에서 먼저 자신이 ‘초식성’이라고 부각하는 화자. 그 앞 두 행, ‘병원에서 나와 동물원에 갔다/사람들은 호랑이와 사자 우리 주변을 서성이지만’과 직후 2연의 1행, ‘잎이 넓은 나무 사이로 자꾸 눈이 간다’에 그 정체성이 충분히 함축되는데도, 굳이 왜 그러는지 좀 궁금하다. 화자는 ‘2’의 1행에서 ‘정형외과에서는 나더러 일자목이라고 하였지’라고 하지 않고, ‘정형외과에서는 일자목이라고 나더러 하였지’라고 한 바, 의미 조성에 어순의 미묘한 차이까지 고려하는 화자이기에.
중복을 무릅쓴 건 아마 ‘호랑이’‧‘사자’와 ‘기린’을 처음부터 보다 분명하게 대조하고, 또 자신이 후자 쪽이라는 지향을 확실하게 드러내고 싶어서인 듯하다. 이 시를 읽어가며 그런 추정이 가능하며, 이 시의 끝 결구, ‘첫사랑 그녀를 만나게 된다’를 읽으면서 그 의향을 보다 가중하여 알 것 같기도 하다. ‘기린’은 바로, 화자가 언제부턴가 다시 그리워하게 되었던 ‘첫사랑 그녀’와 같기도 하기에. 화자와 화자의 ‘첫사랑 그녀’는, 갈등과 폭력의 비린 냄새가 나는 듯한 육식성 ‘호랑이와 사자 우리’같은 시공을 멀리하고, ‘잎이 넓은 나무’들이 늘어선 한적한 ‘우리’에서 사는 ‘기린’과 같은 초식성 존재라는 부조(浮彫).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예상을 이어 이 시가 ‘기린’ 이야기를 표상으로 한 ‘첫사랑’ 알레고리가 아니라는 걸 안다. 또 우리는 안다. 그 결구의 ‘첫사랑 그녀’가 ‘첫사랑 그녀의 얼굴’의 준말이고, ‘기린’의 ‘얼굴’을 가리키는 떠올리게 하는 환유이면서, 화자가 자신은 물론 우리 독자들에게도 ‘첫사랑 그녀’의 ‘얼굴’을 동시에 떠올려보라고 권유하고 있다고.
이 시의 두 번째 매력은 4연과 5연에서 제시되는 과학과 문학의 진실 제시라고 할 수 있다. 다윈(1809-1882)에 앞서 진화생물학의 기초를 구축한 라마르크(1744-1829)의 ‘용불용설(用不用說)’과 ‘획득 형질의 유전’에 따라 ‘기린’의 ‘목’이 나무의 ‘잎’을 ‘뜯다가’ 그렇게 길어졌다는 학설을, 화자는 부인한다. ‘아니야 나를 보는 저 눈을 봐/기린은 기다리다가 목이 길어진 거야’라고. 기린이 자신을 기다리다가 그렇게 되었다는 나직하고 당당한 확신의 토로, 그 전후의 여백에도 조금도 주저가 없다. 그럼 시인과 화자는 그저 과학과 상식을 부인하는 일탈의 몽상가에 불과한가. 그렇지 않다는 것도 우리는 잘 안다. 시인은 시에 과학도 끌어들이고 화자로 하여금 관련 이야기를 하게 할 수 있지만, 정작 과학에 매여 그 이치를 따라 이야기하지 않는다. 시인도 과학을 존중하지만, 주관성 심미와 인문의 진실 지향 비전에서, 즉 예술의 차원에서 자신의 관점과 뜻을 사물에 부여하며 형상화하기에, 시에서 그 관련 주장도 늘 바람직하고 각성의 의의가 없을 수 없고, 우리가 시를 시로 뜻깊게 읽을 수 있는 매력이 아니던가. 더욱이 같은 사람의 크고 미묘한 심정을 우리가 휴머니즘의 연대로 공감하고 통찰할 수 있는 계기가 되며 결국 인식을 넘어서는 감동의 한 진원(震源)이다.
우리는 이 시 화자의 다음 정황들을 거듭 주목하고 음미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나는 기린을 닮으려면 아직 멀었지’란 탄식, ‘말간 하늘’과 ‘출렁이는 바다’가 어린 ‘까만 눈동자’의 ‘착하게 생긴’ ‘첫사랑 그녀’의 ‘얼굴’ 같은 ‘기린’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보는 모습, ‘기린’처럼 이 세상의 사람들과 ‘목을 엇갈려 대며 서로 사랑을 표시’하며, 악역 악순환을 조장하는 ‘술래’잡기를 해체하고, 자신과 다름없는 타자를 자신의 희생양으로 삼는 ‘사다리’게임 폐기를 기원하는 모습을. 화자는 이 소원의 구현을 기원하며 그 동기부여로 자신에게도 우리에게도 진술하였으리. ‘나’를 우리를 ‘기다리다가 목이 길어진’ ‘기린’의 ‘얼굴’을 보면 ‘첫사랑 그녀를 만나게' 되기도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