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종의 문학잡설(155)] ‘오래 버려둔 죄책감’

김승종 / 시인 · 전 연성대 교수

 

 붉은 가을. 덩치가 큰 놈을 잡기 위해 그는 인질을 포획하려 강으로 간다. 작은 인질은 죽지 않을 만큼만 먹이를 준다. 먹이통에 가두고. 그 여름 연명한 인질은 가을이 깊어져야 강물을 만날 수 있다. 연약해진 지느러미, 입에 날카로운 바늘을 물고 물속으로 잠행을 한다. 오래 외로워진 쓸쓸함이 강바닥을 연하게 물들인다. 

 인질은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강물을 흔든다. 바다에서 인질을 구하러 오는 큰 놈. 앞 뒤 가리지 않고 인질을 덥석 품에 안는다. 입안에 따갑게 걸리는 아픔. 큰 놈은 그 아픔이 아픔이 아니었다. 퍼덕이는 물결. 휘청이는 하얀 줄. 하늘이 노랗게 파랗게 변하고 큰 놈은 허공으로 날아오른다. 지느러미는 날개가 되고, 구름 속으로 날아오른다. 오래 버려둔 죄책감. 그렇게 인질을 위해 죽어도 좋았다. 

 그는 큰 놈을 잡기 위해 잔인한 여름을 보내고, 가장 거룩한 낚싯대를 강물에 던진다.

     - 「은어」/서정문

 

 ‘그’의 획책에도 불구하고 ‘큰 놈’은 아무래도 ‘그’에게 농락되듯 피랍되지 않은 듯하다. 잡힌 것이 아니라 잡혀 준 것 같다. 자신의 지친이나 애인이거나 친구로 추정되는 ‘작은 인질’을 ‘구하러’ 바다에서 강으로 스스로 돌아왔고, 미끼인 줄 알면서도 ‘앞 뒤 가리지 않고’ ’덥석 품에 안’듯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작은 인질’을 물었다. ‘입안에 따갑게 걸리는 아픔’은 ‘아픔이 아니었’다. 수면 위로 끌려나올 때에는 ‘하늘이 노랗게 파랗게 변’했다고 해 ‘큰 놈’의 그 고통 우리는 동정하였으나, ‘지느러미는 날개가 되고, 구름 속으로 날아오’르고 있어, 그 비상한 상승의 모습에서, 고통의 승화, 즉 어떤 절정의 열락을 ‘큰 놈’이 겪고 있다고 감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큰 놈’은 ‘작은 인질’과 같이 ‘그’에게 피탈의 ‘인질’이 되고 말았다. 다른 대안이 없지 않을 텐데 왜 이 운명을 선택했는가. 하지만 이미 우리는 어렴풋하나마 안 듯 하다. 전지시점의 화자가 ‘큰 놈’이 ‘오래 버려둔 죄책감’에 시달렸다고 해서. 

 그렇다면 ‘큰 놈’이 지친이나 애인이거나 친구로 추정되는 이를 자신의 사정과 필요에 따라 ‘그’에게 넘겨 ‘작은 인질’로 불우하게 억류하게 하였고, 감방보다 더 치욕스런 ‘먹이통’에 유폐되고, ‘죽지 않을 만큼만’ 먹여져 연명되는 상황을 알면서도 오래 방치하였는데, 한편 자책하기도 하다가 드디어 자신이 ‘작은 인질’과 운명을 같이 하겠다는 결심을 실천하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  

 ‘지느러미는 날개가 되고, 구름 속으로 날아오른다’는 고양의 향유는 ‘죄책감’ 방출이 폭발하듯 고조시킨 벅찬 심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책임과 의리에 헌신하는 ‘큰 놈’의 이 선택에 우리는 우리를 동일시하기보다는 주저하겠지만 따르기 어려운 결단에 흠선의 감명이 없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한편 우리는 ‘큰 놈’의 그 연속되는 아이러니 상황에 못내 유감스럽기도 할 것이다. ‘그’의 획책은 상상 이상으로 집요하고 정교했다. 애초에 ‘그’는 ‘큰 놈’을 ‘인질’로 잡으려는 심산으로 먼저 ‘작은 인질’을 잡아 그 인질로 이용하기로 작정한 것이다. 화자는 처음부터 ‘붉은 가을. 덩치가 큰 놈을 잡기 위해 그는 인질을 포획하려 강으로 간다’고 하지 않았던가. 또  ‘그’는 ‘큰 놈’이 결국 어떤 선택을 할 지 그 지향과 격조도 아울러 예상하고 있었다.   

 우리는 ‘인질을 위해 죽어도 좋았다’는 ‘큰 놈’을 기리다가, 드디어 이 시의 결말 문장, ‘그는 큰 놈을 잡기 위해 잔인한 여름을 보내고, 가장 거룩한 낚싯대를 강물에 던진다’를 읽는다. 갑자기 우리는 ‘그’가 궁금하다. ‘큰 놈’ 못지않게. 그러고 보니 ‘큰 놈’보다 ‘그’가 이 시의 주인공일 수도 있다. 이 시의 첫 문장, ‘붉은 가을. 덩치가 큰 놈을 잡기 위해 그는 인질을 포획하려 강으로 간다’에서도 ‘그’가 부각되지 않았나. 그런데 ‘그’가 영웅을 이렇게도 농락하다니. 아무리 ‘잔인한 여름을 보내’며 이 날을 고대하였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아니 ‘낚싯대’를 ‘가장 거룩’하다고 하는 것부터가 자신의 교활한 성취와 과분한 자만도 스스로 허용하며 높게 평가하는 것이고, 이마저도 가당치 않은데, 나아가 그 ‘낚싯대’를 ‘강물에 던진다’고? 

 하지만 이 탄식이 마치기 전에 우리는 문득 ‘그’의 행동을 단서로 ‘그’의 입장에서 이 상황을 고려해보는 전환을 시도할 것 같다. 그렇다. ‘그’의 최종 선택도 ‘큰 놈’만큼 비상하다. 과감한 중지, 자족의 절제가 아닌가. 그러고 보니 ‘가장 거룩한 낚싯대’ 운운 목소리의 주인공도 ‘그’가 아니라 ‘그’를 관찰하는 화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 시는 일방 우위나 성패의 이야기가 아니겠다. 다시 말해 ‘큰 놈’의 좌절도 ‘그’의 성취 이야기도 아니고, 죄책감 해소나 자족의 중지를 주제로 하지도 않는다. 확실하지 않지만, 인연으로 엮인 존재들의 상호작용과 상호달성의 역설을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도 자신의 낚시질에 혹시 회의하며 ‘오래’ ‘죄책감’을 느껴오기도 한 것인가. 그리하여 마침내 때를 헤아려 결정한 용단일 수 있다.     

 ‘작은 인질’도 우리로 하여금 그 관련 정황을 반추하게 한다. ‘그 여름’을 겨우 ‘연명’하여 ‘가을이 깊어져야 강물을 만날 수 있’었던 ‘연약해진 지느러미’의 ‘작은 인질’이, ‘입에 날카로운 바늘을 물고 물속으로 잠행’하는 모습. 자신의 ‘오래 외로워진 쓸쓸함이 강바닥을 연하게 물들’이는 가운데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강물을 흔’드는 정경.  우리의 심정에도 어느새 파문처럼 스며든다.     

 또 한편 이 시는 그 시선과 호흡을 우리에게 느끼게 한 전지 시점의 화자도 한번 생각하게 한다. 상황을 제시하고 ‘그’와 ’큰 놈’과 ’작은 인질’의 외면과 내면을 관찰하고 분석한 화자는 두 곳에서 자신의 생각을 드러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는 위에서 언급한 대로 ‘그’의 그 ‘낚싯대’를 ‘가장 거룩’하다고 형용한 대목이다. 이는 반어일 수도 있겠으나 낚시질을 중단하겠다는 의지로 ‘낚싯대’를 ‘강물’에 던져 버리는 행위에 수렴되기에 말뜻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에서도 우리는 화자가 ‘큰 놈’뿐만 아니라 ‘그’와 ‘그’ 행위 전부를 바라보는 시선이 앞에서 검토한 대로 배타가 아니라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이 시 첫 어구 ‘붉은 가을’. ‘가을’이 붉다는 묘사의 주체는 새삼스럽지만 ‘그’도 아니고, ‘큰 놈’도 아니고, ‘작은 인질’도 아니며, 보통 있는 사례가 아니다. 그냥 가을을 장식하는 단풍에서 유추했다고 추정할 수도 있지만, 화자가 작중 전체 상황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또 자신의 마음 상태를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 시행의 맥락에 따라 그 의의를 부연한다면, 작중 공간이자 사연의 무대인 ‘강’의 이미지에 영향을 행사한다고. 이후 시행에 연관되는 가운데, 특히 ‘오래 외로워진 쓸쓸함이 강바닥을 연하게 물들인다’에서 생략된, 그 물들이는 색(色)이 붉다고.

 이 시를 음미하고 나자 ‘큰 놈’의 헌신이 다시 상기되고 어쩐지 한 인물이 어렴풋이 연상된다. 위기에서 예수를 부인하였고 로마가 기독교인을 박해하자 로마에서 도망치다가, 로마로 가는 부활한 예수를 만나 “십자가에 다시 못 박히러 로마로 간다”는 말을 듣고 크게 부끄러워하며 로마로 되돌아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리기를 자청해 순교했던 베드로가. ‘오래 버려둔 죄책감. 그렇게 인질을 위해 죽어도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