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종의 문학잡설(157)] ‘만리로 열린 귀를 찾네’
1975년 한강 변 흑석동에서 27살 승려 문학도가 시 한편을 22살 대학 후배의 노트에 적어주었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들은 이미 주석에서 몇 차례 어울렸고 둘이서 통금 시간까지 남았다가 근처 여인숙에서 숙박하기도 한 사이였다. 그날 새벽에 선배가 “이마를 벽에 대고 흐느끼”는 모습을 후배는 보았다. 훔쳐본 정경이 아닐 것이다. 선배가 이 후배에게는 자신의 그 표출을 자제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여겨 그랬을 수 있다. 아무튼 그 시는 그런 소통의 결과이자 차후 긴 인연의 발단이라고 하겠다.
두런두런
발 아래 풀잎 속에
정지된 공간의 틈서리에서
오 저기 저
버려진 귀면(鬼面) 속에서
알아들을 수 없게 두런두런
만리(萬里)로 열린 귀를 찾네
못 보고 못 듣는
두억시니로 여기 와서
내 문득
스산한 바람소리가 되네
- 「절터」/최영해(1949-2011)
이 시의 작중 공간 ‘폐사지(廢寺址)’는 우리에게 여전히 낯설고 실제로 둘러보기도 어려우며 그럴 기회가 있다 하더라도 위축되기 쉽다. 인적 없고 잡초 무성하고 깨진 기와 조각이 무정하게 잔존하는 황량한 산중. 흔적이 희미해 오히려 부처의 숨결과 승려의 체온 부재를 믿을 수 없는 정경. 어느 폐허보다도 무상하기만한 그 이역(異域)에서, 화자는 그 분위기를 꺼리거나 위축되지도 과장하지도 않는다. 그 중심에 진입해 자신을 존치하고, 오히려 친화의 기운까지 발산하면서 모종 추구를 시도한다.
4행, ‘오 저기 저’란 감탄 섞인 발견과 각성의 토로, 7행 ‘만리(萬里)로 열린 귀를 찾네’란 심상치 않은 전언. 우리는 문득 전자에 힘입어 편승하고 후자를 의아하게 여기면서 이 시의 사연에 기꺼이 빠져든다.
‘두런두런’, 즉 ‘나지막한 목소리로 서로 조용히 이야기하는 소리’. 고절한 폐사지에서 이 소리를 들은 화자는 어디서 그 소리가 나는지 찾는다. ‘풀잎 속’ ‘틈서리’에 ‘버려진’ 귀면와(鬼面瓦)[잡귀나 재앙을 막기 위해 추녀 끝 서까래에 붙이는 귀신 얼굴 장식기와], 그 ‘귀면 속에서’ ‘두억시니’[모질고 사나운 망매(魍魅)의 일종]’들이 ‘만리로 열린 귀를 찾’겠다는 의논을 하고 있다. 그 출현이 놀랍지만 그렇다면 그들은 원래 그런 ‘귀’가 있었고, ‘두억시니로 여기 와서’에서 알 수 있듯, 전생(前生)에는 두억시니가 아니었다는 사연이 함축되어 있다. ‘두억시니’들이 전생에 무슨 죄업과 탈선을 저질렀는지 알 수 없지만 그 업보로 현생에서 ‘두억시니’가 되어 현재 폐사지 귀면와의 ‘귀면 속’에 유폐되어 있는 중이라고 우리는 그 내력과 사정을 대강 알 수 있다.
나아가 우리는 이제, 게다가 화자가 ‘두억시니’들이 ‘못 보고 못 듣’는다고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도 주목해야 한다. 이 역시 전생의 업보일 수밖에 없겠다. ‘두억시니’들의 운명은 가혹하다. 화자는 3행에서 귀면와가 버려진 풀숲을 ‘정지된 공간’이라고 진단하였고, ‘두억시니’들은 또 그 귀면와의 ‘귀면 속’에 감금되어 있기에 자신들의 옛 ‘만리(萬里)로 열린 귀’를 찾기를 희망하고 있기는 하나 그 희망의 목소리는 나약하고, 무엇보다 이중 격절로 해서 그 달성은 지난하다. 아니 현생에서 아무래도 찾지 못 할 가능성이 높다. 더욱 문제 되는 것은 혹 ‘정지된 공간’과 ‘귀면’을 부수고 탈출해 그 ‘귀’를 되찾는다고 하더라도, 결국 세상을 보지는 못 한다. ‘못 보고’ 만다. 그렇다면 ‘두억시니’들은 언제나 여전히 불구가 예정되기도 한 존재들이며, 온전한 자신을 회복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다만 겨우 ‘두런두런’하고만 있는 것인가.
상대의 전생과 현생을 통관하는 화자. 아무래도 ‘두억시니’들의 전생에서부터 밀접한 인연으로 엮여있는 처지인 것 같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러고 보니 4행 ‘오 저기 저’란 토로에는 그 발견에 안도하고 반색하는 어조도 서려 있고, 화자와 ‘두억사니’들과의 모종 관계가 느껴진다. 하지만 우리는 그 사연을 제대로 알기는 어렵고 추정하기는 하지만 자신은 없다. 이 시의 결미 두 행, ‘내 문득/스산한 바람소리가 되네’를 읽으면서는 더욱 그러하다. 우리는 우선 이 표현을 둘로 나눠 이해할 수 있다. 하나는 ‘두억시니’들의 막막한 처지를 동정하는 화자가 자신의 그 심정을 ‘스산한 바람’으로 은유한 언급으로. 다른 하나는 역시 동정을 전제로 하지만 말 그대로 ‘스산한 바람’으로 변신했다는 언급으로. 참고로 ‘스산한 바람소리’는 흐리고 으스스한 소리, 쓸쓸하고 뒤숭숭한 소리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최종 국면에서 우리는 이보다 더 큰 난관에 직면한다. 말미 두 행을 그 직전 ‘못 보고 못 듣는/두억시니로 여기 와서’에 연속해 읽고 취지를 헤아렸는데, 따로 구분해 읽을 수 있고 그래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여백을 두고 읽는다면, 화자의 처지가 달라지고 처지에 함축된 뜻도 달라진다. ‘두억시니’들의 우울하고 딱한 운명을 안 화자는 ‘두억시니’들의 현재 처지를 감당하지 못하게 동정한 나머지 차라리 부는 바람으로 도피하는 형국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바람’은 다른 세계 다른 차원을 전전하다가 이 폐사지로 돌아와 더 ‘스산한’ ‘소리’를 낼지 모른다.
후배 시인 김홍성은 최근 자신의 페이스북에 「11. 닭울음소리」(2018년 1월 21일)를 다시 게재하며 선배 최영해의 시와 삶을 거듭 추억하였다.
적음(寂音) 형이 남긴 육필 시집 『저녁에』를 골방에서 찾았다. 〈홍익 21 출판사〉에서 2004년에 냈다. 어쩌다 이 시집이 나에게 왔는지는 잊었다. 연작시 「새벽에」가 거기 실려 있다.
삼생(三生)을 지나서도
시인임을 잊지 마세요
(이런 편지를 받았다)
꼬끼오 하고 몇 번 씩이나
닭울음소리가 들렸다
삼생 시인 …….
부끄러움이 전신을 휩싸고 도는
이 새벽에
- 「새벽에 1」
우리는 합장하며 이 시도 다시 읽지 않을 수 없다. ‘삼생(三生)을 지나서도 시인임을 잊지 마세요’. 이 천외(天外)의 청원을 한 이는 누구일까. 시인이 현생을 떠난 지 15년. 오늘 우리가 어느 폐사지에서 들을 수 있는 ‘스산한 바람소리’는 시인의 내생(來生)일 것이며, 술과 정에 더 끌려 시인 명목에 부끄러웠던 시인은 그 청원을 아마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