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좌우익의 분열
해방 후 수원에는 우익성향의 대한국민촉성국민회 수원지부와 좌익타도를 명분으로 내세운 대한국민촉성청년동맹 수원지부 등이 있었다. 이들은 대동청년단 수원군단부의 결성으로 통합됐으며, 군사훈련을 강화하기 위해 정규장교를 배속했다.
좌익단체로는 일제강점기 때 민족운동을 하던 박승극이 이끄는 수원인민위원회가 있었다. 1945년 11월 초 박승극은 지방당국에 구금당했고 이에 불만을 품은 수원군 일대 농민들이 폭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서울에서 여운형 씨가 직접 내려왔다. 조사결과 당시 박승극이 군수를 방문해 친일파적 인물을 수원읍장에 임명한 것에 항의하자 당국에서 군수를 위협 공갈했다는 이유로 구금했던 것이었다. 이 문제는 여운형 씨가 미군정 당국자와 면담을 통해 원만히 해결했다.
박승극을 필두로 한 좌익세력은 1946년 10월20일 좌익분자 일제검거령으로 체포당했다. 이후 남로당 수원군당으로 개편해 1947년 3월 수원가마니공장과 도가니공장 파업사건, 하곡수매 반대운동, 단독정부 수립 반대운동 등을 펼쳤다. 그러나 1948년 8월 15일 남한정부 수립 이후 남로당에 대한 일제검거로 수원지역 남로당원은 대부분 월북했다.
대한청년단장을 역임한 박창균 씨는 해방 직후 수원에서는 좌익성향이 강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진보당 활동을 했던 이득성 씨는 달리 증언했다.
“해방 직후 전국적으로 습격을 안 당한 데가 없는데 수원경찰서만은 습격을 당하지 않았다. 그만큼 수원시민들의 성향이 혁신적이고 진취적인 게 부족하다는 얘기다. 전쟁 때도 마찬가지다. 흐물흐물 넘어가는 거다. 그건 수원이 수도권에 속해서 이리저리 쳐다보고 하는 그런 속성 때문이 아닌가 싶다.”
● 고물가와 생필품 부족
1946년 8월 특산물가가 폭등했다. 원자재 부족과 극심한 연료난 때문이었다. 시장엔 쌀이 전혀 없는 상태였다. 1941년 대두(大豆) 1섬당 31원 하던 것이 1946년에는 1섬의 10분의 1밖에 안 되는 1말 가격이 220원이나 됐다. 무려 70배 이상 폭등한 것이다. 백미(白米)도 1말에 370원이나 했고 1년 후인 1947년 10월에는 700원으로 껑충 뛰었다. 다만, 수원지역의 목탄은 용인지방에서 입하되고 있었으나 비수기여서 가격이 급락했다. 당시 주 연료였던 목탄 6매 가격은 40원이었다. 식산은행 수원지점은 장기예금이 전무한 채 단기예금만 활발할 뿐이었다. 정당한 경로에 의한 생필품 배급이 끊긴 채 매점매석 행위로 매매가 정체된 상태였다.
1947년 상반기에는 정부가 생활용품의 통제시책을 펼쳐 생필품의 암거래가 성행했다. 7월 들어 곡물이 새로 출회되고 반·출입 단속이 완화되면서 한 때 백미 1말당 270원까지 곡물가격이 하락했지만, 일용품과 농기구 가격은 계속 올랐다.
한편, 1948년 수원에서도 신문이 창간됐다. 그러나 ‘화성매일신문’이란 제호로 발행된 이 신문은 창간호를 발간하고 자취를 감췄다. 수원상공회의소 사무국장을 지낸 오상근 씨에 따르면 그 당시 수원에는 신문을 사서 볼만큼 여유 있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1945년 초만 해도 경찰관 월급이 40원밖에 안 됐다. 수당이 붙으면 한 80원 정도 됐다. 이것도 일반 공무원보다는 조금 많은 편이었다. 그런데 일본이 항복하면서 물가가 뛰었다. 380원으로 경찰 봉급이 올랐고 이듬해인 1946년에는 1천 원이 보태져 1천380원이 됐다. 그나마 군인들은 일반 공무원보다 월급이 나은 편이었다.”
결국, 정부는 1차 화폐 개혁을 1953년에 단행했다. 그때 100대 1로 개혁이 이뤄져 1만 원이 100원이 됐다. 예컨대 시장에서 2천600원 하던 자장면 한 그릇이 25원으로 가격이 내렸다. 그렇게 되자 국민의 돈 씀씀이가 더 헤퍼졌다. 정부는 5·16 이후 1962년 다시 환으로 화폐단위를 바꿨다. 그러다 다시 환이 지금의 원이 됐다.
● 재건의 노력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했다. 수원은 그 피해가 그나마 미약했다고 생존자들은 증언한다.
그래도 전쟁 통에 동문(창룡문)과 장안문이 날아갔다. 동문은 인민군이 들어온 것도 아닌데 호주기가 날아와 이유 없이 폭격했다.
장안문은 국군이 매설했던 대전차 지뢰 20여 발이 터지면서 홍예만 남기고 폭파됐다.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다. “북문은 부서지고 남문은 남아있고 서문은 서 있고, 동문은 도망갔네.”라는 동요가 전쟁 당시 떠돌았다. 한국등잔박물관 관장을 지낸 김동휘 씨는 “철원 피난민들이 궁 근처에서 움집을 짓고 살았다. 그때 불을 피워야 하니까 남의 집 창이고 대문이고 다 떼다 태운 거다. 그때 화성이 거의 다 망가졌다”고 밝혔다.
전쟁이 종료되면서 재건의 노력도 활발해졌다. 그러나 전쟁 중 난립한 판잣집을 도시미관상 강제철거하면서 난민들을 거리로 내모는 결과를 가져왔다. 전쟁이 끝나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피난민들을 위해 수원시에는 두 개의 정착촌이 형성됐다. 1954년 상이용사 30세대 152명에게 지동의 임야 10.1정보를 밭으로 개간할 수 있도록 했고, 강원도 출신 부녀자 83세대 465명에게 남수동에 가내수공업을 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줬다.
1955년에는 전쟁으로 암흑화됐던 수원역전 밤거리를 밝히기 위해 박제만 씨 외 55인이 ‘가로수 가설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이들은 수원역전에서 매산국교까지의 도로에 60W짜리 전등 20개를 가설해 수원 밤거리를 밝혔다.
● 수원서 꽃핀 4.19
1960년 4.19혁명의 불꽃은 수원에서도 피었다. 수원에서는 4월 23일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다. 수원농림고등학생과 수원북중학생들이 영화동을 거쳐 장안문으로 진출했고, 수성고등학생와 수성중학생들 역시 장안문을 거쳐 팔달문으로 내달았다. 종로에 있었던 삼일고등학생과 매향여자상업고등학생, 매향여중학생들이 합류했고, 팔달문을 향해 올라오던 수원고등학생과 수원중학생, 수원여자고등학생들도 한 행렬을 이뤘다. 시위대는 역전광장과 장안문을 돌아 계속 행진했다.
한편, 서울대학교 농대학생들은 23일 새벽 서울 중앙청까지의 강행군에 돌입했다. 경찰들은 서둔동육교에서 학생들을 저지했으나 800여 명의 학생은 저지선을 뚫고 화서문과 장안문을 거쳐 지지대로 향했다.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장정(長征) 시위는 이것이 첫 케이스였다. 수원의 시위는 4월 24일 이승만이 하야하면서 진정됐다.
4.19 당시 수원에서는 학생들보다 일반인들이 시위를 주도했다는 증언도 나왔다. 초대 예총 경기도지부 부지부장을 맡았던 안익승 씨는 “수원에서도 데모가 심했다. 학생들보단 일반인들이 많이 했다”며 “기억으로는 예식장 종업원들이 많이 참여했는데 역전과 남문에서 시위가 자주 벌어졌다”고 증언했다. 사회적 약자들의 참여가 두드러졌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