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가의 시집들에서 한 시집(1993년)을 꺼내들고, 오래 닫혀있던 그 문을 열자, 한 시의 작중에서 ‘안개비가 내리고 있다.’ ‘부슬부슬’, ‘부슬부슬’. 마침 그날은 그해 ‘곡우(穀雨)’. 하늘이 만물의 생장을 촉진하고 축하하는 그 봄날, 대학 재학시절 드나들던 흑석동 정든 술집으로 귀환한 마흔을 바라보는 한 시인이 한 후배와 막걸리를 마시며 대화하고 있다. 두 사람은 술에 취하였지만 인사불성도 아니고 화제도 심상치 않다.
부슬부슬 안개비가 내리고 있다
비가 하염없이 말을 한다
.............................
..................................
.....................................
........................................
...........................................
..............................................
“형님,
사람들은 죄다 불쌍합니다”
하모 하-몬
- 나는 그저 노가리의 쾡한 눈만 본다.
“형님,
저는 요 술 한 잔이면 백 잔이나 똑같습니다”
음 그래- 그래야지
- 동행하는 아우가 나의 육신을
빨래감 쥐어짜 듯하고 있다.
“형님,
시나 소설이나 다 같지요”
예술이라면 기고 삶이 아니믄 아니지
- 먼 산은 육중하게 가라앉고 있다
“형님,
우리 잔디처럼 삽시다”
오야- 맞다
-푸르면 푸르게, 누르면 누렇게,
비 오면 평등하게 비 맞고
그렇게 살자
“형님-,
나갑시다
잔디밭에 얼싸 뒹굴어 버립시다”
그려 그-려
- 막걸리나 또 한 잔 추스르고 보자.
하염없이 비가 말을 한다.
안개비가 가슴으로 내린다.
- 「곡우」 : 대학시절 대폿집에서/최수호
우정과 우애가 막걸리 못지않게 돈독한 선배와 후배. 네 가지 화제의 대화에서 두 사람의 생각과 처지는 같으면서 다르고 다르면서도 같다. 선배는, 후배는 물론 ‘비가 하염없이 말을 한다’며 사뭇 내리는 비를 의식하고 있고, 후배는, 내리는 비를 동기로 삼아 자신의 생각을 ‘하염없이’ 토로하면서 선배의 동의를 바란다. 선배의 응답과 내면의 독백에서 선배의 생각 또한 후배와 별로 다르지 않고, 지난 시절에 지녔던 생각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후배도 알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선배와 후배와 미묘하게 다르다. 3연에서 후배가 ‘사람들은 죄다 불쌍합니다’고 하자 선배는 ‘하모 하-몬’이라 동의하는데, 건성 대답으로 들리지는 않지만 ‘나는 그저’ 안주 ‘노가리의 쾡한 눈만 본다’고 해서. 그 ‘쾡한 눈’이 세상 사람들의 눈이며 후배의 눈일 수도 있겠는데, 이 대목에서 우리는 선배의 심정이 후배의 심정과 다르다고 느낄 수 있다. 자신의 지난날과 같은 후배의 호연지기 동정에 사회 직장 생활을 하며 마흔에 이른 선배가 어찌 ‘그저’ 동의해줄 수만 있겠는가. 후배의 그 토로에는 존재의 한계와 비애가 섞여 있고, 선배의 그 응시에는 각박한 생활의 그늘이 어려 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후배가 ‘저는 요 술 한 잔이면 백 잔이나 똑같습니다’고 하자, 선배는 ‘음 그래- 그래야지’ 하면서도 ‘동행하는 아우가 나의 육신을/빨래감 쥐어짜 듯하고 있다’고 한다. 선배는 지취를 공유하는 후배가 ‘동행하는 아우’이면서도 자신의 ‘육신’[아마 자신의 직장 사회생활과 세상 인식의 환유인 듯]을 ‘쥐어짜 듯’한다고 내심 독백한다. 왜 그런지 우리는 잘 알 수 없다. 후배의 말을, 가슴에 늘 그런 비애가 있고 술 ‘한 잔’이면 가득 차올라 술이 더 필요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여 그럴 수 있고, 술 ‘한잔’을 사 마시기도 부담된다는 가난을 탄식하는 심정이 얼핏 섞여있다고 여겨 그럴 수도 있으며, 형님과 마시는 술이라면 한 잔이라도 백 잔과 같아 넉넉해서 좋다는 뜻이 있다고 여겨서 측은 비슷한 심정이 되었을 수도 있다.
이상의 차이와 유감은 그러나 5연을 계기로 소멸된다. 후배가 ‘형님,/시나 소설이나 다 같지요’라고 하자, 선배는 단박 완전 동의하면서 ‘예술이라면 기고 삶이 아니믄 아니지’라고 구체 부연까지 한다. 시와 소설이 예술로서 그러하고, 예술은 어디까지나 삶이어야 한다. 아니라면 부정해야지. 선배의 이 견해는 조금도 변경 없는 지난날부터 견지해오는 소신일 것이다. 예술작품에 삶의 진정성이 없어서는 안 된다는 추구뿐만 아니라, 두 사람의 이 대화에서 예술과 삶은 하나라는 태도를 공유하고 있다고 우리는 느낀다. 이 모습을 혹시 예술지상주의라고 한다면 적합하지 않을 것이다. 예술의 진정성과 삶의 진정성이 일치하여야 한다는 신념이지, 예술이 삶에 우선해야 한다는 주장이 아니니까. 그런데 선배의 직후 갑작스러운 독백, ‘먼 산은 육중하게 가라앉고 있다’에 우리는 다소 놀라며 이 하강을 갑작스럽다고 여기다가 곧 1연 1행 에서 우리가 감지했던 선배의 그 내면에 이어지는 일관된 경향으로 추정하게 된다. 선배는 자신의 신념을 확인하는 동시에, ‘부슬부슬’ 내리는 ‘안개비’ 같은 현실에서 ‘육중한’ ‘먼 산’같은 그 신념이 ‘가라앉고 있다’고 느끼고 있는 것 같다고. 하지만 또 반전이 이어진다.
‘형님,/우리 잔디처럼 삽시다’란 후배의 여전한 제안에 선배는 ‘오야- 맞다’며, ‘푸르면 푸르게, 누르면 누렇게,/비 오면 평등하게 비 맞고/그렇게 살자’고 하는데, 때로는 신념대로 때로는 신념에서 일탈하는 대로, 또 같이 비 맞듯 이 세상에서 차이 없이 살아가보자는 취지가 아닌가 한다. 선배의 복잡한 생각과 태도에서 그 압권은 결미에 있다. 후배가 ‘나갑시다/잔디밭에 얼싸 뒹굴어 버립시다’고 하자, 과감하게 ‘그려 그-려’ 하면서도, ‘막걸리나 또 한 잔 추스르고 보자’는 언급. 후배를 추스르는 속 깊은 배려이면서도 자신을 짐짓 추스르는 위무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