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영 광교칼럼] 나는 ‘어르신’이 될 수 있을까?
세월이 이렇게 저렇게 흘러 올해 우리 나이 칠순이 됐다. 만으로는 예순아홉이다. 세월이 참 잘 간다.
아니나 다를까? 아홉수마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반야심경’이 또 마음을 바쁘게 만든다. 반야심경은 산스크리트어로 Prajñā-pāramitā-hṛdaya-sūtra(프라즈냐파라미타 흐르다야 수트라)다.
프라즈냐파라미타는 반야(般若)바라밀다, 흐르다야는 심(心=心臟), 수트라는 경전이다. 즉, 불교의 모든 내용을 요약한 불교 경전의 핵심이자 정수이다.
19세 때 반야심경을 접한 뒤 10년 주기로 ‘공’과 ‘무’의 방문이 있었다. 들어와서 아는 것 같았는데 다시 도망간 세월이 어느덧 50년이다.
겨우 ‘공’의 뜻을 잡았다고 생각하면 ‘무’에서 덜컥 걸렸다.
없다니...나 여기 지금 분명히 있어 밥 먹고, 손자 재롱 보며 바보웃음 짓고 있는데. 무아(無我)라니.
그런데 요즘 알음알이지만 ‘내가 없는 것’이란 생각이 어리석었음을 깨닫고 있다. ‘영원한 내가 없다’는 뜻이었다는 작은 깨달음. 한 살 때의 내가 지금의 나인가? 10년 후의 나는? 숨이 끊어진 상태여도 나인가?
‘나’라고 생각하는 ‘그 자’만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편안해졌다. 사실은 환갑 지난 후부터다. 이제 억울하지 않을 만큼은 살았다는 생각을 하고나니 성격이 많이 둥글둥글해졌다. 주변사람들의 평가도 그렇다. 술벗이기도 한 역사학자 이달호 형은 “이제야 좀 사람이 됐다”며 벼린 칼 같았던 내 과거를 들추기도 한다.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사실이니까. 뭐, 급한 성격이야 어디 가지 않았지만.
그래서인가, 나는 일찍부터 머리카락이 하얗게 세기 시작했다. 50줄에 들어서는 아예 백발이 됐다. 일찍부터 노인대접을 받았다.
버스나 전철을 타면 젊은이들이 자리양보를 했고 길에서 만나는 아이들은 주저 없이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그 무렵 ‘어르신’이라는 말도 듣기 시작했다.
어르신이라...사전적인 의미는 남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높여 이르는 말이다. 아버지나 어머니와 벗이 되는 어른도 해당된다.
이와 함께 존경할만한 노인에게도 어르신이라 높여 부른다. 요즘엔 나이가 든 사람들 모두를 어르신이라고 한다. 언론이나 관공서에서도 어르신이란 말을 스스럼없이 쓴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 존경받을 만한 노인들이 그리 많았던가?
나부터도 어르신이란 말을 들을 자격이 없다. 내가 이웃에게, 지역사회에, 이 나라에 크게 기여한 바가 없기 때문이다. 추위에 떠는 이에게 남은 잔돈 털어주고 순댓국 한 그릇 사 주는 일조차도 가뭄에 콩 나듯 드물게 행한다. 내 스스로 생각하니 존경받을 만한 인품도 없다.
하지만 나에겐 어르신이라고 부를만한 사람들이 있었다.
세상을 떠난 김동휘 선생, 이종학 선생, 안익승 선생, 심재덕 시장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러고 보니 모두 35년 전 화성행궁복원추진위원회를 발족해 이끌면서 수원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어르신들이다.
이들 외에도 더 많은 어르신들이 있겠지만 내가 과문한데다 활동적이지 못한 탓에 더 이상 떠오르지 않는다.
어쨌거나 내가 어르신이 되려면 아직 멀었다. 다음 생이 있다면 어르신이 될 수 있을까?
어르신이란 말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나이는 들었지만 아직 청춘인데...” 늙은 사람 취급이 싫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한다. 젊은이들의 정서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많은 젊은이들이 왜 노인들과 거리를 두려할까? 오랜 세월 살아오면서 자신이 구축해놓은 틀 안에서만 생각하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변했는데 나의 잣대로만 판단하고 그 판단을 강요하는데 가까이 다가올 젊은이들은 없다.
나도 함께 변해야 한다.
앞에서 반야심경을 예로 들면서 ‘영원한 내가 없다’고 했다. 강물은 흐른다. 어제의 강물은 오늘의 강물이 아니다. 그런데 그 물이 영원하게 고여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불교 신자가 아니다. 하지만 절집에 가면 3배를 하고, 성당에 가면 성호를 긋는다. 느낌이 좋은 오래된 예배당에서도 가만히 앉아 묵상을 한다. 몇 년 전 (사)화성연구회 여름 답사 차 우즈베키스탄에 갔을 때는 이슬람 성전에 들어가 무연히 앉아 있다 나온 적도 있다.
나이가 들면서 좀 더 차분하고 평화로워졌으면 좋겠다. 이쪽저쪽 구분하지 않고 그냥 그대로 바라보는, 그 흘러감을 느끼는 ‘공’의 상태가 지속되면...아, 그러면 드디어 불가에서 말하는 득도인가? 성불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