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영 광교칼럼] 한스런 평생 춤과 노래로 녹여낸 정경파 선생

김우영 논설실장 / 시인

경기도무형문화재 제8호 화성재인청계열 춤 살풀이춤 -정경파(상)

화령전 풍화당. (사진=이용창 화성연구회 이사)
화령전 풍화당. (사진=이용창 화성연구회 이사)

설 연휴에 앞서 미리 이천에 있는 국립묘지 호국원에 가서 부모님께 인사를 드렸기에 연휴는 더욱 길었다. 설 전날 영화동에 사는 딸네 집에서 가족들이 모두 모였다.

딸과 사위가 자기네 집에서 고기를 구워먹자고 해서다. 나와 아내, 딸 둘, 아들 둘, 거기에 사위와 외손자까지...잔칫집처럼 복작복작하다.

‘눈치 없는 노친네’가 되기 싫어 적당히 어울려주다가 빠져 나왔다.

내 발길은 자연스럽게 화성행궁으로 향한다. 35년 전 화성행궁 복원에 뜻을 함께 한 이들을 떠 올리며 세월이 마냥 덧없는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신풍루를 거쳐 유여택과 봉수당, 낙남헌, 미로한정까지 천천히 돌아본 후 정조대왕의 어진을 모신 화령전으로 갔다.

국가 보물로 지정된 화령전은 볼 때마다 감탄을 하게 된다.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품격이 느껴지는 잘 지은 건물이다.

마지막으로 내 발길이 향한 곳은 풍화당(風化堂)이다.

풍화당은 화령전의 제실로 사용된 건물이다. 제실에서는 제사를 주관하는 헌관이 머물며 준비한다.

그런데 이곳에서 이동안 선생과 정경파 선생이 머문 적이 있다.

이동안(李東安, 1906~1995) 선생은 화성재인청의 마지막 예인(藝人)으로서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제79호 ‘발탈’ 예능보유자였다.

경기도 화성(당시 수원군) 출신으로 1983년 6월 1일 보유자로 지정 받았다. 살풀이·태평무·승무·진쇠춤·검무·희극무·선달무·북춤·소고춤 등 17가지의 춤에 능했다고 하며, 어름산이(줄타기)·대금과 태평소·남도잡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예의 소유자였다.

함백산추모공원 내 문화예술체육인 특화묘역에 안장된 운학 이동안 선생. (사진=화성시)
함백산추모공원 내 문화예술체육인 특화묘역에 안장된 운학 이동안 선생. (사진=화성시)

13살까지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14살 때에 남사당패를 따라 가출 했다. 1년여 그곳에서 줄타기와 땅재주를 배우다가 집에 끌려와 억지로 혼인을 했지만 다시 집에서 도망 나와 광무대에 들어갔다. 광무대 시절 김관보(줄타기), 장점보(대금, 피리, 해금), 방태진(태평소), 조진영(남도잡가), 박춘재(재담, 발탈) 등으로부터 배웠다. 이후 당대의 춤꾼이었던 김인호에게 30여 종의 전통 무용과 장단도 배웠다.

광무대 활동 당시 이동안의 인기는 엄청났다고 한다. 그가 줄타기를 할 때면 출연료로 소 두 마리 값을 받았고 구경꾼들이 주는 팁이 하룻밤에도 월급쟁이 한 달 수입을 상회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다. 그는 24세 때 수원 권번에서 기예를 가르치는 선생노릇도 했다고 한다.

그가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것은 1977년 3월 4일 한량춤 및 발탈 발표회(전통무용연구회 주최)와 1979년 공간사랑 발탈 장기공연, 1983년 한국명무전, 한국 명무 큰잔치에 출연하면서부터였다. 1985년에는 무용인생 80년을 기념하는 공연 ‘이동안 춤판-팔순 기념공연도 개최했다.

나도 선생의 공연을 한번 본 적이 있다. 아마 그것이 마지막 무대였을 것이다. 1993년쯤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당시 오산운동장 옆에 있는 문화회관(체육관도 겸했다)에서 공연이 열렸다.

다음은 2021년 11월 9일자 수원일보에 쓴 ‘김우영 광교칼럼- ‘우리시대 마지막 광대 이동안 선생’의 일부다.

‘지금 오산엔 번듯한 공연장이 생겼지만 당시엔 이곳이 유일한 실내 공연장이었다. 그러니 조명도 음향도 형편없었다. 관중들도 사방이 휑하니 뚫린 스탠드에 앉아 운동경기를 보듯 관람해야 했으므로 집중력이 떨어지는 어수선한 공연환경이었다.

그럼에도 80중반을 넘겨 몸이 불편한 노인은 한 손짓 한 걸음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혹시나 공연 중 쓰러지기라도 할까봐 가슴 졸였지만 ‘진쇠춤’이 끝날 때까지 무대를 장악했고 객석을 압도했다.’

제자들의 면면도 화려하다. 최승희를 비롯해 김백봉, 문일지, 배정애 등과 신숙, 장월중선도 이동안 선생의 제자들이라고 알려져 있다.

1999년 10월 9일 제36회수원화성문화제에서 살풀이춤을 추는 정경파 선생. 1년 후 선생은 세상을 떠난다. (사진=이용창 화성연구회 이사)
1999년 10월 9일 제36회수원화성문화제에서 살풀이춤을 추는 정경파 선생. 1년 후 선생은 세상을 떠난다. (사진=이용창 화성연구회 이사)

화성재인청 승무·살풀이춤의 명인으로써 지난 1996년 초대 경기도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정경파 선생도 이동안 선생을 춤의 스승이자 아버지로 모셨다.

그런데 정조대왕의 어진을 모시는 화령전의 재실인 풍화당에 왜 이들이 거주하게 됐을까?

1908년 정조 어진을 서울로 옮긴 뒤 화령전은 비어 있는 상태였다. 이때 풍화당은 지역 어른들이 관리하기 시작했다. 일종의 경로당 같은 역할을 했고 이곳에서 시조와 창 강습도 이루어졌다.

이동안 선생을 이곳으로 모셔 살게 하면서 춤과 소리를 가르치게 했다. 이때 정경파 선생이 선생을 지근에서 보살피면서 기예를 전수받았던 것이다. (다음 회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