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무형문화재 제8호 화성재인청계열 춤 살풀이춤 -정경파(하)
정경파(1934. 11. 6~2000. 9. 28)선생은 화성재인청 승무·살풀이춤의 명인으로써 지난 1996년 경기도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
원래 충북 옥천 태생이지만 그의 선친을 따라 진주에서 살았고, 어린 시절부터 그곳에서 남도창을 배웠다. 처음 춤을 배우기 시작한 것은 14세였다.
“14살짜리 소녀 정경파의 춤사위는 잘 단련되고 연마된 쇠붙이와 같았다. 그가 겪어 온 시대적 상황도 그러하거니와 춤판에 입문한 뒤의 생활 역시 파란의 연속이었다. 이동안 선생의 슬하에서 50년 넘게 줄곧 살풀이만을 고집해 온 것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지난 2001년 2월 경기도가 펴낸 ‘경기문화를 빚는 사람들’에서 정경파는 이렇게 소개되고 있다. 글 쓴 이가 이처럼 단정 짓는 것은 이유가 있다. 그는 말년에 경기도 무형문화재, 즉 흔히 말하는 ‘인간문화재’로써 이름 난 예인이었지만, 생애의 바탕에는 한이 깔려 있는 것이다. 평생 춤의 외길을 걸은 대가로 무형문화재 지정을 받았지만 그 명예를 누린 기간은 안타깝게도 고작 4년 밖에 되지 않았다.
정경파의 한 많은 생애는 자연스럽게 ‘살풀이 춤’을 택하게 됐을 것이고 춤의 스승인 이동안 선생을 만나면서 더욱 춤사위가 절제되고 깊어졌을 터이다.
옥천에서 태어났지만 진주로 이사해 살았다. 진주는 예향으로 잘 알려진 곳으로 자연스럽게 창과 춤을 접할 기회가 많았을 것이다. 게다가 어렸을 때부터 북과 장고소리를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공연이 있는 날에는 객석이 모두 빈 다음에도 아쉬움에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또 그 때 들었던 가락을 흥얼거리며 돌아다니길 좋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일부에서는 아버지를 따라 진주로 간 것이 아니라 혼자 집을 나왔다는 설도 있다. 창을 배우고 싶은 마음에 가출해 진주로 간 뒤 먹고 지내기 위해 기생의 양녀로 들어갔는데 그 때 나이가 14살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달성권번에서 이농주에게 창을 배웠다고 한다.
이후 한성권번의 남도창 명인인 박성준에게 창을 공부했다. 아예 그 집에 들어가 물을 긷거나 빨래를 해 주면서 창을 배웠다고 한다. 그런데 끼니를 자주 굶었다. 창을 잘 하기 위해서는 밥을 먹어서는 안 된다고 들었기 때문이란다. 유명한 춤꾼이었던 한성준의 문하에서 춤을 익히기도 했다.
청주 권번에서는 김숙자, 최미옥과 함께 창을 했다. 6.25전쟁 때는 김칠성, 최미옥, 김숙자, 봉선 등과 함께 전시문화공작대에서 토막연극이나 소리, 춤 등으로 군인 위문공연을 한 적도 있다.
나이 18세 때 첫딸을 얻었지만 그 행복은 길지 않았다. 몇 년 후 새 가정을 꾸리고 아들도 낳았지만 남편은 곧 세상을 떠났다.
정경파의 일생에서 큰 전기가 된 사건은 이동안과 인연을 맺은 것이다. 여인의 몸으로써 인생의 모진 풍파를 겪으며 고생을 할 때다. 정경파는 이동안을 공연 중에 만났다. 처지를 딱하게 여긴 이동안이 손을 내밀었다. 정경파도 친 아버지처럼 모셨다.
이동안은 정경파에게 수원의 국악원으로 오라고 해서 그곳에서 3년 동안 거처하면서 타령, 굿거리, 팔박, 살풀이춤, 승무, 검무, 농악, 신대신무를 가르쳤다고 한다.
정경파는 한동안 수원의 국악원을 맡아 운영한 적이 있었다. 이동안이 관련 단체를 만들어 나가면서 그에게 국악원 운영을 맡긴 것이다. 그러나 그 건물은 국가 소유여서 얼마 뒤 그곳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에 송탄으로 내려가 국악원을 운영하면서도 이동안과의 교류는 계속했다. 그 뒤 정경파는 이동안에게 서울 용산과 오산에 학원을 마련해 주는 등 신세를 갚았다고 한다.
이런 인생을 살아오면서 심장병, 천식, 알레르기 등의 병을 얻었다. 밤에 기침을 하면 목에서 피가 나왔다고 한다. 이런 어려운 형편을 알게 된 국악협회에서 화령전 풍화당에 국악원을 차려주어 거기에서 오랫동안 살았다. 이동안의 말년도 거기서 정경파와 함께 했다.
이 풍화당에서 이동안과 정경파가 제자들에게 춤과 소리를 가르친 것인데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지금과 같지 않을 때여서 가능했을 것이다. 물론 지금은 거기서 사람이 기거하거나 더욱이 춤과 소리를 연습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이때 정경파로부터 춤을 배운 한국무용 전문지도자 김현옥은 한 인터넷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정경파 선생의 살풀이춤은 보는 이를 매료시켰다는 당대 사람들의 평이 세상 널리 알려져 있어요. 수원에 사는 동안 길러 낸 제자만도 수백 명이 넘습니다, 경기도 일원에서 무용 학원을 경영하는 제자들도 많아요.”라고 증언한다.
정경파는 생전에 자신이 살아 온 이야기를 할 때마다 눈물을 내비쳤다. 어찌 아니겠는가. 그처럼 한 많은 일생, 기구한 인생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몸은 비록 흙으로 돌아갔지만 그의 예혼(藝魂), 노랫가락과 춤사위는 수백명 제자들에게 전해져 지금도 재현되고 있다.
화성재인청 살풀이춤은 화성재인청의 마지막 예인인 이동안에서 제1대 예능보유자인 정경파와 현재 제2대 예능보유자인 김복련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경기도지방에서만 전하는 설화를 배경으로 무복과 춤사위가 전승되고 있다.
한 많은 삶을 살았던 정경파는 갔지만 그가 지키고자 했던 예술혼은 이렇게 전승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