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영 광교칼럼] 수인선을 타다, 외할머니를 생각하다
그날 외할머니 생각이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났다. 이끌리듯 송도역으로 가는 수인분당선 전철에 올랐다.
외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신 지 수십 년이 됐고 가끔씩 생각이 났지만 실행해보지 못했던 ‘송도행’이었다.
외할머니는 내가 군대에 있을 때 송도역 앞에 좌판도 없이 고무 함지박 하나에 생선 몇 마리, 나물 몇 움큼을 놓고 파셨다. 1978년 봄 송도역 인근 공사장으로 파견근무(나는 주특기와는 무관한 공병이었다) 할 때 거기서 외할머니의 모습을 보았다.
후줄근한 작업복 차림의 내 모습을 본 할머니는 말없이 속곳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접혀있는 천 원짜리 지폐 몇 장을 꺼내 내 손에 쥐어주셨다.
당신이 가진 전 재산임을 알고 있기에 받지 않으려 했지만 끝까지 손을 잡고 놓아주시지 않는 바람에 기어이 내 주머니로 들어갔다.
몇 년 뒤 외할머니는 세상을 떠나셨다. 어머니의 전언에 의하면 “고깃국이 먹고 싶다”는 말을 남기셨다고 한다. 의사는 영양실조가 큰 원인이었다고 했단다.
그런 할머니가 장사밑천까지 털어 손자에게 용돈을 주신 것이다.
송도역은 그런 사연이 있는 곳이었다. 그러면서도 수인선 협궤(狹軌)열차가 마지막 운행을 한 1995년 12월 31일 이후엔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수인선 협궤열차는 궤도 간격이 762㎜에 불과해 ‘꼬마 열차’ ‘미니열차’로 불렸다. 우리나라 철로의 표준궤간이 1435㎜이니 절반밖에 안됐다. 처음엔 석탄을 때는 ‘혀기 증기기관차’가 화물차와 객차를 끌었으나 나중에는 디젤동차(動車)로 바뀌었다.
수인선은 일제가 자원을 수탈하기 위해 수여선에 이어 만든 철도다. 1937년 7월 11일에 개통, 수원시~인천시를 오갔다. 해방 후에는 생선장수, 직장인과 학생들이 주로 이용했다.
명절에 인천 외갓집에 갈 때, 또는 김장용 새우젓을 사러 소래포구에 가시는 어머니를 따라 수인선 꼬마열차를 타곤 했다. 삭은 새우젓갈 냄새, 생선비린내에 찌들은 기차 안 풍경, 멀미 등이 내 기억에 남아 있다.
그래도 그리운 추억이었는지 1995년 12월 30일, 폐선을 하루 앞둔 그날 수인선 협궤열차를 탔다. 그날 열차 안은 나처럼 폐선되기 전 마지막 추억을 남기려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어린 시절을 화성시 봉담읍 수영리에서 보냈다. 동네 북쪽 피난민 마을인 ‘수용소’라는 곳으로 수인선 철로가 지나갔다.
그때 추억을 수원문화원이 발행하는 ‘수원사랑’ 2020년 겨울호에 소개한 바 있다.
‘오목내’라고 불리는 수원시 오목천동과 ‘수용소’ 사이에는 수인선 협궤열차가 지나가는 터널에서 위험천만한 담력 테스트를 하기도 했다. 철로 위에다 못을 올려 작은 칼을 만들기도 했다. 철로의 폭이 좁기 때문에 작은 장애물에도 탈선할 위험이 높았다는 것은 철이 들고 나서야 알았다. 생각할수록 참 아찔하고 위험한 행동이었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던 수인선 꼬마 협궤열차는 25년 만에 표준궤 최첨단 복선전철로 돌아왔다. 수인선 복선전철은 1단계 오이도~송도 구간이 2012년 6월, 2단계 송도~인천 구간은 2016년 2월에 개통했다.
수인선의 상징적인 거점이었던 송도역사도 역사의 뒷길로 사라지는 듯했다. 그러나 2022년부터 추진된 인천시 연수구 복원 사업을 통해 지난해 10월 ‘(구)송도역 전시관’으로 재탄생했다. 현재의 송도역으로부터 500미터 동쪽에 있다.
이곳에는 미디어타워, 협궤 열차, 증기시계탑과 함께 국내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협궤 전차대와 철제 급수탑이 있다. 전차대는 원형 레일과 중심축이 그대로 복원돼 있어 기차 방향을 돌리던 과거 장면을 연상할 수 있다. 급수탑은 기관차에 물을 공급하던 옛날 모습 그대다.
옛 송도역사 앞에서 한참동안 서 있었다. 지형이 변해 외할머니가 생선과 나물류를 파시던 곳은 어딘지 정확하게 알 수 없었지만.
비록 없는 살림이지만 지금 살아계신다면 용돈도 드리고, 그토록 드시고 싶었던 고기도 사드릴 수 있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