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종의 문학잡설(160)] ‘그리움 없는 데로’

김승종 / 시인 · 전 연성대 교수

 멀지 않은 지난 한 시기 국내에 여행 오거나 한시 거주하던 외국인들이 자기 나라에서 볼 수 없는 한국의 사회차원 전통 경로(敬老) 현상을 목격하고 무척 부러워했다. 청년들이 노인을 공경하고 예우하는 모습과 행동이 이미 전대와 달리 무척 약화됐던 상태를 알면서도 우리는 그나마 다행으로 여겼다. 그런데 근년 언제부턴가 순서나 양보에서 청년세대와 갈등이 노골화되면서 급기야 폭력과 더불어 꼰대, 틀딱 등 비칭(卑稱)이 일반화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변화는 계속된다. 요즘 주변 젊은 노인들을 둘러보면 그런 청년세대를 비난하거나 불평하지 않는다. 배려나 예우도 바라지 않고 그들의 가중되는 학업난과 취업난, 결혼과 주택과 육아 문제 고민을 이해하려 한다. 다만 오류나 결례가 있어도 간여하지 않으려 하고.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고 봉변당할 우려가 크지만 불 간여를 미덕으로 여기는 듯하다.   

 다음 시의 노인 화자는 이상 경향과 다른 태도로 자신과 세상을 보고 전망하며 다짐한다. 어쩌면 낯설지 않지만 낯익지는 않다고 하겠다.     

 

정신이 있는 한 

팔십에도 문득 깨닫고

반성하고 고칠 수 있다.

 

이제까지 온 길보다

더 멀리 더 높이 날아올라

내려다 볼 수 있다.

 

땅에선 볼 수 없는 것 더 보려고

오르다가, 오르다가 점이 되었다가

먼지처럼 멀어져선 사라지는 것이다.

 

나이 먹을수록 더, 더 멀리 

더, 더 높이 갈 수 있다.

그러다가 사라지는 것이다.

그리움 없는 데로 사라지는 것이다.

                 - 「덤」/김원길

               

 1연을 읽고 그 뜻을 수긍하지만, 2연으로 시선이 옮겨가지 않고 잠시 우리는 생각하게 된다. 나이 ‘팔십’의 ‘반성’과 자기교정. 유감스럽지만 그러고 보니 겸손이 아니라 인정할 수 있는 종종 있는 일이기에 그렇다고 하더라도, ‘정신이 있는 한’이란 전제가 ‘문득’ 우리의 시선을 붙잡는다. 따질 것도 없이 당연한 조건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신이 있는 한’, 누구나 ‘반성하고 고칠 수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정신이 온전해도 자신과 주변에 나태하거나 실은 잡념으로 어지럽고 마땅히 대면하거나 손잡아야 할 것을 외면하거나 내로남불 고집을 거칠게 용인하기도 하기에. 아마 화자의 ‘정신’은 바르고 맑은 의식일 것이다. 

 그렇다면 1연의 취지는 그런 정신이 유지된다면 대인관계를 비롯하여 여러 생활에서 간혹 빚어질 수 있는 잘못이나 미흡이나 간과나 결함을 자각할 수 있고, 그때마다 스스로 교정하기를 계속하겠다,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화자가 표명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비록 ‘문득’이라 하여 자신의 의지를 희석하였지만 화자의 자기기율은 상시 가동되고 있다고 하겠고. 한편 우리는 1연의 맥락 행간에서 화자가 자신을 그렇게 격려하고 있다고도 느낀다. 즉 나이 들수록 화자는 자신의 정신 상태를 잘 유지하면서 자신의 언행에 주의해오고 있다. 하지만 ‘팔십’에 이르러도 인간은 언행에 유감스러운 일이 일어나며, 화자도 예외가 아니라서 ‘문득’ 자각하고는 ‘반성’하며 교정하고 있다.  

 2연에서 그 계기로 진전되는 진경 묘사가 시도된다. 여기서 ‘이제까지 온 길’은 화자가 경과해온 ‘팔십’ 이전 삶의 여정이며, 이에 연계된 보는 행위와 대상은 그 ‘길’에서 목격하고 체험한 갖가지 정경과 사연, 세태와 인심일 것이다. 그리고 1연의 결과는 놀랍다. 즉 ‘팔십’ 이후에도 자신을 ‘반성’하고 교정하면 그 ‘길’보다 ‘더 멀리 더 높이 날아올라/내려다 볼 수 있다’. 즉 세상의 이모저모를 확대된 시야로 넓게 관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다. 3연에서 보듯 그러다가 ‘땅에선 볼 수 없는 것 더 보려고’, 즉 세내(世內)에서 세외(世外)로 시선을 돌리게 되고, 그러다가 세상사 관심이 소실되면서 어느덧 그곳으로부터 까마득히 한 ‘점’으로 멀어지다가, ‘먼지처럼’ ‘사라’질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인간 존재의 이런 추이를 양해하고 있다. 그리고 ‘오르다가, 오르다가’ 된 ‘점’에서 우리는 모종 이색 승화를 기대하였으나, 겨우 부재를 모면했을 뿐이란 자각을 화자가 하고 있는 반전성 전회(轉回)에 직면하고,  ‘먼지처럼 사라진다’는 확고한 단언을 허무와 무관하게 허용하고 만다. 

 참고로 이 국면의 메시지는 ‘팔십’이 넘어서도 인간은 노력한다면 안목과 행실에 진경이 있지만 결국 광활한 우주에서 미세한 존재에 불과하고 그러다가 흔적도 없이 애초 살던 땅에서 사라져버린다는 것인데, 우리는 이 문맥에서 허무가 은근히 부각되고 있다고 느끼지 않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저 겪어야 할 범박한 운명이라고 여길 것 같다.   

 4연은 1, 2, 3연의 반복이며 그 정리이자 강조인데, 그 끝 행 ‘그리움 없는 데로 사라지는 것이다’로 하여, 이 시를 복기(復棋)하듯 다시 읽고, ‘그리움’을 재차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세속의 삶을 정리하고 세속 바깥의 영역에 들어서며 알 수 없는 곳으로 자신이 사라지는데, 그곳은 ‘그리움 없는 데’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정신이 있는 한’ ‘그리움’을 망각할 수 없다는 것도 아닌가. 

 우리는 대체 이 ‘그리움’이 어떤 ‘그리움’인지 궁금하지만 잘 알 수 없다. 그런데 화자와 같이 사단 칠정을 지니고 그 조합과 변주로 살며 이런저런 연분을 맺고 풀다가  짧고도 긴 생애의 끝에 이르러선 우리도 모든 것에 손 잘 흔들며 사라질 수 있어야 하겠는데, 그래도 한번쯤 ‘그리움’에 젖어보는 것도 인간답다고 하겠다. 이 시 제목 아래에 ‘병오 원단에 마지막 행을 추가하다’란 시인의 첨언이 부기되어 있다. 무언가 허전했기 때문이었을까. 우리는 시인의 추가에 동의하여야 하리. ‘그리움’이 어떤 ‘그리움’인지 이제 화자에게 묻지 말고 우리 자신에게 한번 물어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