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종의 문학잡설(161)] ‘무수한 빗금이 칼날처럼’
그렇다. 자식이 어머니를 자세히 보는 날이 있다. 마치 발견하듯, ‘이제 늙어 쭈글쭈글한 육신’의 어머니를. 그저께도 보았고 어제도 보았던. 어머니는 갑자기 늙는 것인가. 아니다. 제대로 보는 순간 어머니가 늙은 것일 것이다. 우리와 비슷한 화자는 아마 그렇게 어느 날 어머니를 보고, 굳이 어머니의 ‘운명’을 ‘언표’하게 된다. 어머니의 ‘영혼’에도 도저히 부인할 수 없게 ‘무수한 빗금이 칼날처럼 새겨져’ 있다고.
평생을 막일로
자식 셋을 키워낸 어머니는
이제 늙어 쭈글쭈글한 육신에 그 영혼에
무수한 빗금이 칼날처럼 새겨져
라고 말하면 안 된다
라고 말할 수 없다
어머니는
말이 아니라
언어 이전에 언표 바깥에서
평생을 막일로 어떤 잠재성도 가능성도
어떤 특이점도 변곡점도 없는
외삽의 필생을 사셨다
어머니의 연속성과
어머니의 항상성과
어머니의 필연성 사이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고
그리하여 운명이란
누가 시켜서 사는 게 아니라
버티며 살아내는 것이라는 표식을
온몸에 온 마음에 새겨놓았다
라고 말하면 안 된다
라고 말할 수 없다.
- 「라고 말할 수 없다」/김재홍
우리는 1연의 1-4행을 읽고 대번 공감하면서 그 다음 진술을 경청할 준비를 동시에 했는데, 5, 6행 ‘라고 말하면 안 된다/라고 말할 수 없다’라는, 화자가 부랴사랴 자신에게 다짐하는 금지의 독백에 당황한다. 급기야 자신이 본 대로 말하면 ‘안 된다’고? 무슨 각성의 기미가 있는데, 하여간 왜 ‘안 된다’는 것인가. 게다가 화자는 연속하여 그렇게 ‘말할 수 없다’고 자신의 그 인식을 더욱 부정한다. 어머니의 이력, 사실 그 자체를 부인하지는 않아 보이는데, 화자의 심중에는 부인을 합당하게 하는 신념과 같은 모종 기준 확인이 있었다고 여겨진다.
2연에서 우리는 그 기준, 즉 그렇게 말한 이유를 들을 수 있었다. 어머니의 그 ‘운명’은 ‘언어 이전에 언표(言表) 바깥에서’ 별도로 그 자체로 존재하였다고 여기기 때문. 이 시행의 취지는 다음과 같지 않을까. 언어는 특정 이데올로기의 형식이자 세계관의 도구이며, 어머니의 ‘평생’ ‘막일’ 운명에 ‘빗금’이 ‘칼날처럼’ ‘새겨져’있다고 운운한다면, 기존 언어의 편향 관행을 무연히 답습한 피동 ‘언표’에 불과해 그래서는 ‘안 된다’고. 따지고 보면 어머니는 그 체제 그 질서와 무관하게 그 ‘바깥’에서 ‘어떤 잠재성도 가능성도/어떤 특이점도 변곡점도 없는/외삽의 필생을 사셨다’고 하겠기에. 즉 어머니는 ‘막일’ 그 자체에 종사하며 자족하며 살았다고 해야 옳다는 것. 참고로 ‘외삽(外揷 : Extrapolation)’은 ‘과거의 추세가 장래에도 그대로 지속되리라는 전제 하에 과거의 추세를 연장해, 미래와 간과했던 과거의 상태도 일정하게 유추하는 추정 방식’. 이 시행의 취지는 3연에서 반복 강조된다. 어머니의 ‘운명’은 그 자체로 일관된 ‘연속성’ ‘항상성’ ‘필연성’의 ‘필생’이며, 그 ‘사이’에 그 어떤 ‘잠재성’이나 ‘가능성’, ‘특이점’이나 ‘변곡점’ 등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고.
이 강조는 4연에서 선언으로 고조된다. ‘그리하여’ 어머니에게 ‘운명이란/누가 시켜서 사는 게 아니라/버티며 살아내는 것’이었으며, 그 ‘표식’으로 ‘무수한 빗금’을 스스로 자신의 ‘온몸에 온 마음에 새겨놓았다’고.
우리가 이렇게 정리를 시도해보자마자, 4연의 말미 5, 6행에서, ‘라고 말하면 안 된다/라고 말할 수 없다’는 진술이 다시 등장하고 문맥은 부정과 부인으로 급변하고 만다. 횡설수설 번복하는 신뢰할 수 없는 화자인가 의심하면서도, 우리는 화자의 의사를 다음 두 가지로 이해해볼 수 있다. ‘평생을 막일로/자식 셋을 키워낸 어머니’는 ‘외삽의 필생’이었기는 하지만, 그 삶에도 ‘기술적 특이점’이 나타날 수 있어, 변화와 이탈을 촉진하는 ‘잠재성’과 ‘가능성’, ‘변곡점’ 등이 없었다고 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어머니’의 ‘막일’ ‘평생’의 ‘연속성’과 ‘항상성’과 ‘필연성 사이’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 와해와 일탈을 초래할 무엇이 존재하기도 했다고 할 수 있어,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 그래서 그렇게 ‘말할 수 없다’...
한편 이 국면을 우리는 애초 정황을 부각하는 이중부정의 전경화(前景化) 화법으로 접근해볼 수 있다. 즉 ‘이제 늙어 쭈글쭈글한 육신’의 어머니를 마치 발견하듯 보고나서, ‘평생을 막일로/자식 셋을 키워낸 어머니’는 ‘육신에 그 영혼에/무수한 빗금이 칼날처럼 새겨져’있다는 무연한 인식을 하게 된 화자가 자신의 시선과 탄식을 경신하다가 결국 조응하는 과정으로.
이 시는 문학사에서 거듭 출현하는 사모곡의 하나지만 중첩되는 부정의 변전이 독자의 안목을 쇄신하면서 주목을 고양하는 개신의 면모가 약여하다.
그래서 우리는 작중 ‘어머니’와 화자를 위로하다가 문득 ‘자식’을 ‘키워낸’ 우리의 모든 ‘막일’ 어머니에도 ‘무수한 빗금이 칼날처럼’ ’새겨져’ 있는, 아니, ‘칼날처럼’ 새긴 ‘무수한 빗금’을 상기하게 된다. ‘어떤 잠재성도 가능성도’ ‘어떤 특이점도 변곡점도’ 있었으나, 자식을 위해 ‘외삽의 필생’을 선택한 자신의 ‘육신에 그 영혼에’ 새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