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종의 문학잡설(162)] ‘사막의 꽃’

김승종 / 시인 · 전 연성대 교수
[김승종의 문학잡설(162)] ‘사막의 꽃’
[김승종의 문학잡설(162)] ‘사막의 꽃’

 

 우리는 문학작품을 읽으며 감동 향유를 알게 모르게 기대한다. 우리의 영혼에 파문을 일으키는 신선한 진정성의 작고 큰 폭발들을. 감동은 건전한 쾌락이며, 우리의 문제 인식과 태도를 변화시킨다. 일상 인식의 여러 한계와 현실의 처지와 시야에 매여 우리는 결국 원만하지 못한 소견을 지닐 수밖에 없고, 평소 그런 상태를 각성하기가 너무 어렵다. 어떤 계기가 도래하여 그럴 수 있지만 관련 경험을 거쳐야 하고 성찰 시선의 관조가 없어서도 안 되며, 무엇보다도 한정된 삶의 시간을 아깝게 소모해야 한다. 그래서 인간은 성장과 함께 후회하는 존재라고 하겠다. 알다시피 훌륭한 예술은 우리를 일시에 감동시키며 그 유감과 소모를 크게 단축시켜 준다. 

 어떤 장르들을 군집하여 예술이라고 명명하는 이유로 작가의 평범하지 않은 기예(技藝)[어떤 메시지를 심미 차원으로 형상화하는]를 우리는 전제하는데, 그렇지 않은 좋은 작품도 많다. 기예가 없거나 미약하여도 우리는 메시지 그 자체에서도 감동받을 수 있어 특이한 수사의 점철이나 낯선 이미지 출현을 꼭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고 하겠다. 이 검토는 새삼스럽지만 특히 문학에서 메시지 자체의 진정성을 고려하게 한다. 다음 시는 그럴 뿐만 아니라 서술성 배경 묘사에 포함된 이미지들이 우리의 시선을 끌기도 한다.     

 

아프리카 남부 남아프리카공화국 위

해 질 녘 바오밥나무가 서 있는 풍경이 너무나도 고즈넉한

생소한 땅 보츠와나로 이민 간 친구에게서

꽃 두 송이가 영상으로 배달되었다

 

메마른 사막에 활짝 핀

나무도 줄기도 이파리도 없이 모가지만 똑 따서

황무지에 꽂아 놓은 듯한 이름 모를 꽃이

보는 이 없어도 야무지다

 

국토의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거친 사막에

이맘때면 색깔도 선명한 야생화들이 

쇠똥처럼 불쑥불쑥 솟아나

황무지를 수놓는다는 보츠와나

 

과묵한 고향친구

하마 까마득히 이 땅을 떠나 

몇 해 전 다니러 온 그에게 어떻게 사냐고 묻자

빙그레 웃으며 어디나 다 마찬가지여

 

이역만리 낯설고 물선 아프리카

망치 쥐고 구슬땀 흘려

홀로 뿌리 내린

사막의 꽃 

                - 「보츠와나」/임채우

 

 이 시는 평이하게 잘 읽힌다. 어떤 시들에서처럼 두세 번 검토해야 할 표현 관련 심미 장치의 애매 국면이나 리듬의 활성화된 촉진도 없고 해서 산문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1연 2행 ‘해 질 녘 바오밥나무가 서 있는 풍경’은 우리의 뇌리에 잘 이월되며, 화자는 그저 ‘고즈넉’하다고 했지만 그곳의 황막한 토양과 기후를 유장하게 연상할 수 있다. ‘쇠똥처럼 불쑥불쑥 솟아나’ 그곳 ‘황무지를 수놓는’ 키 작은 ‘야생화들’의 모습에도 괄목하지는 못하지만 우리 감각의 피부는 메시지의 일부로 그 이미지에 잘 응축하고 있다고 하겠다.    

 우리는 이 시 읽기를 마치고, 화자의 ‘보츠와나’ 친구, ‘메마른 사막에’ ‘활짝 핀’ ‘꽃’ 같은 ‘친구’를 화자와 같은 심정으로 어느덧 자랑스러워하고, 부러워할 것 같다. ‘나무도 줄기도 이파리도 없이’ ‘모가지만’ 땅위에 드러낸 ‘꽃’같은 그 ‘친구’이기에 더욱.   

 그런데 어떤 독자들은 ‘이역만리’에서 ‘망치 쥐고 구슬땀 흘려/홀로 뿌리 내린’, 그 장도의 성취를 기려서 그렇다기보다는, ‘하마 까마득히 이 땅을 떠나’가 그런 박토에서 자신의 ‘뿌리’를 그렇게 내려 보겠다는 의지 그 자체가 정작 부러워서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감동할 수가... 그도 아마 성취를 자신하고 떠나가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추정하면서. 또 어떤 독자들은 옥토가 아니면서도 옥토 같기도 한 연고와 관계로 겨우 뿌리 내린 세속 현실이 지루하고 무미하여 그처럼 황막한 불모의 ‘이역만리’ ‘거친 사막’에 자신을 죽든 살든 그렇다 ‘홀로’ 방기해버리고 싶은 욕망을 자각하고 그럴 수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욕망을 잘 의식할 수 없고, 곧 경계하며 쓴웃음을 짓는다고 해도, 우리는 비몽사몽 아니 그 막심한 인욕(忍辱)의 욕망을 어렴풋하게나마 감지하고 자신 가슴의 동계(動悸)에 스스로 놀랄 것이다. 같은 시집의 바로 뒤에 수록된 다음 시를 읽는다면 그럴 독자들이 늘어날 것 같다.       

 

사는 게 제각각인 듯해도

아파트 1층에서 꼭대기까지 비슷비슷하여

텔레비전 앞 거실 소파

층층이 안방 침대

문득, 포개자는 걸 생각하면

 

한길 스치는 사람들 제각각인 듯해도

나름대로 착각덩어리

너나없이 모순덩어리

앞서거니 뒤서거니 세상 볼 일 마치면

돌아보지도 않고 영안실행이라니 

               - 「끔찍하다」

   

 우리는 그렇게 ‘영안실’로 가고 싶지 않다. 화자와 달리 ‘아파트 1층에서 꼭대기까지 비슷비슷’ 한 건 뭐 견딜 수 있겠지만, ‘안방 침대’까지 ‘포개자는 걸’ 따라 ‘생각하면’ 우리의 그 형편에 ‘문득’ 모골이 가려울 만큼 참기가 어려울 수 있겠다. 그런데 이도 간신히 억제할 수 있다고 하여도, 2연의 ‘사람들’은 ‘나름대로 착각덩어리/너나없이 모순덩어리’란 탄식에 그저 무안해지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세상 볼 일 마치면/돌아보지도 않고 영안실행’이라는 지척을 독설이 아니라고 여기면서 참 자신과 이웃이 ‘끔찍하다’고 중얼거릴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래도 황급하게 앞 시 「보츠와나」로 돌아가, ‘바오밥나무’가 서 있는 그 ‘황무지’로 들어가 ‘해 질 녘’일지라도 경신의 삶을 한번 살고 싶어 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화자의 그 ‘친구’는 ‘빙그레 웃으며 어디나 다 마찬가지여’라고 또 말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