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정치 등등 어느 분야든 신인과 새 작품이 계속 등장해야 미래를 기약하고 발전도 기대할 수 있다. 우리는 역사의 진전에 따라 과학은 전대보다 향상되지만 예술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서구의 문학사가들은 소포클레스의 「외디프스 왕」이 후대의 명작들을 능가하는 최고 걸작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견이 있고, 문학도 역사의 진전과 사회 변화를 반영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성찰케 하거나,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공명할 있어야 할 세계를 제시하며 그 추구를 촉구하는 문제 제기를 하여야 바람직하다. 이 가운데에 새 주제와 시각 제출도 포함된다. 최근 한 시전문지에서 신인상을 수상한 시인의 한 시를 읽었다.
이상하리만치 차가 없는
새벽 한 시 이십일 분 고속도로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듯한
가로등 불빛
아무 것도 바라지 않아도
기도하는 건 어떤 마음일까
그런 게 진짜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지만
고속도로는 멈춰있고
그 안에서 마음껏 달려 본다
엑셀을 밟으면
부풀어 오르는 밤하늘과
핸들을 돌리면 틀어지는
쌍둥이자리
내가 원하지 않아도
핸들은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고
의식하지 않아도 차선을 맞추듯
타이어는 타이어로 돌아오는 순간
왜 이곳에서는 내가 보이지 않는 걸까
뒤 범퍼를 환히 비추는 전조등
나를 따라오는 경적
쫓기듯이 달리다 보면
움직이기 시작하는 와이퍼
빗방울이 닿으면 뭉개지는 앞 유리
갑자기 쏟아지는 이 비처럼
자동차를 추월하는 다른 자동차들처럼
나는 나에게 추월당하고
계기판에 알피엠이 버티질 못할 만큼
액셀을 더 꾹 밟아 보지만
그러나 아직 그곳에 나는 보이지 않고
다가가고 있고 다가올 그곳에
스키드 마크만 남아 있다면
그런 흔적은 어디서 왔다고 말해야 할까
힐끔 바라본 백미러에서
나를 본 것도 같은데
전방 오백 미터 앞 카메라가 있다고
이젠 그만 속도를 줄여야 한다고
속도를 줄이지 않더라도
만약 속도를 줄였다 하여도
남아 있는 건 단 하나
그곳은 이 고속도로의
상상에 불과한가
일부러 내 앞을 막는다면
급브레이크를 밟고
아무도 모르게 유유히
고속도로에서 빠져나가기
- 「기도는 사실 아무것도 없는 고속도로」/양선구
한 밤중에 차로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화자는 가로의 ‘가로등’에서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모습을 연상하고, 전후 맥락이 생략되었지만 자신의 어떤 문제에 관련시켜 화두라고 할 문제를 제기한다. 그것은 3연에서 부각된 대로, ‘아무 것도 바라지 않으’면서 ‘기도’하는 ‘마음’은 어떤 ‘마음’인가?
이 질문은 우리에게 낯설다. 우리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면 대체 무엇 때문에 왜 ‘기도’하느냐고 쉽게 반문하려다가 문득 ‘아무 것도 바라지 않’기를 자신에게 바라며 어떤 절대자에게나 그런 설정 없이도 그렇게 ‘기도’로 기구하는 ‘마음’이 있겠다고 납득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런 기도에 매력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 그러기 위해서 더 간절한 ‘기도’가 필요할 것이다! 이 국면에서 우리는 두 가지 이해도 추가하게 된다. 하나는 ‘그런 게 진짜 있을 것이라/생각하지 않았지만’에서 알 수 있듯, 화자의 이 화두는 한 밤중 이 시간 최초의 발상이 아니라는 사실. 다른 하나는 화자로 하여금 이 한 밤중의 질주를 추동하게 할 정도로 화자가 어떤 욕망으로 갈등을 겪고 있다는 추정이다. 우리는 이제 화자의 내력과 상태를 좀 이해한 듯해, ‘엑셀을 밟으면/부풀어 오르는 밤하늘과/핸들을 돌리면 틀어지는/쌍둥이자리’란 정경을 마치 그 차 뒷좌석에 동승해서 보고 있는 듯하며 같은 기분을 우리에게 허용한다.
그런데 그 직후 화자의 내면에는 다시 이전의 갈등이 재래(再來)한다. 우선 5, 6연은 그 토로이자 묘사이다. ‘내가 원하지 않아도/핸들은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고’를 고속도로 주행 중의 실제 묘사이면서도 그 재래를 병렬 환기하는 환유라고 읽어도 좋을 것이다. 이어지는 6연의 두 행, ‘의식하지 않아도 차선을 맞추듯/타이어는 타이어로 돌아오는 순간’도 실제 정황이면서도 그 강조이고, 직후 ‘왜 이곳에서는 내가 보이지 않는 걸까’란 탄식을 더욱 주목하게 한다.
이런 변전은 작중 이 시행 직전에 발생했지만 그 직후에 도치로 제시된 것으로 보이는 ‘뒤 범퍼를 환히 비추는 전조등’과 ‘나를 따라오는 경적’에 ‘쫓기듯이 달리다’가, 화자에게 도래한 상황이다. 게다가 ‘갑자기’ ‘비’가 ‘쏟아지’며, ‘움직이기 시작하는 와이퍼’에 ‘앞 유리’가 ‘뭉개지’고 있다. 화자의 내면도 그렇게 동요되고 있다고 우리는 연상한다. 또 고속도로의 사정도 바뀐다. ‘자동차’를 ‘자동차들’이 ‘추월’하며, ‘나는 나에게 추월당하고’만다... ‘나’를 ‘추월’하는 ‘나’는 문맥으로 보아 이미 앞에서 시사했던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기도’가 ‘진짜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던 어떤 욕망에 시달렸던 ‘나’일 것이다. 그래서 화자는 ‘계기판에 알피엠이 버티질 못할 만큼/액셀을 더 꾹 밟아 보지만’ 여의치 않다.
그런데 그 이후 시행에서 ‘추월’ 여부를 분명하게 알 수 없으나, 10연 ‘힐끔 바라본 백미러에서/나를 본 것도 같은데’를 읽으며 우리는 ‘추월’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어차피 야밤 그 질주에서 그 ‘추월’은 실제 여부보다 화자의 느낌이 더 중요하다. 그런 와중에 화자는 ‘전방 오백 미터 앞 카메라’를 인지하고 ‘이젠 그만 속도를 줄여야 한다고’ 하는데, 다시 화자는 의외로 ‘속도를 줄이지 않더라도/만약 속도를 줄였다 하여도/남아 있는 건 단 하나’라고 각오한다.
유일한 대책인 그 ‘하나’는 끝 연에서 보듯, ‘급브레이크를 밟고/아무도 모르게 유유히/고속도로에서 빠져나가기’이다. 그런데 이는 행위가 아니라 생각이다. 또 이 생각 실행의 증거가 될 ‘스키트 마크’도 앞으로 실제로 존재할지 그 여부를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 생각의 상태에서 감상을 멈추어야 마땅하다. 이런 종료 또한 우리에게 낯선 편이지만 우리의 어떤 삶의 국면은 그 연속일 수 있다.
한편 우리는 그리하여 화자가 질주하며 남기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궁금한데, 추정하기 어렵다. 다만 9연에서 ‘그런 흔적이 어디서 왔다고 말해야 할까’란 자문(自問)을 주목하며 화자가 자신의 두 ‘나’가 교호하고 교차하는 좌표에서 자답(自答)의 ‘말’을 모색하겠다는 암시를 하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 화자에게 더 무거운 비중의 숙제가 하나 더 있다. 9연의 ‘그러나 아직 그곳에 나는 보이지 않고/다가가고 있고 다가올 그곳’, 13연에서는 ‘이 고속도로의/상상에 불과한가’며 의아하게 여기기도 한 ‘그곳’, ‘스키트 마크만 남아 있’을 수 있을 ‘그곳’이 대체 어떤 곳인지 궁리하여 후편에서 시사하거나 드러내야 하지 않겠나 하는 것이다. 혹시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상 공간인 ‘유토피아(Utopia)’인가. 혹시 현실에 실재한다는 이질 공간인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