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종의 문학잡설(164)] ‘파란 봄풀 돋은 언덕으로 가지 마라’
지난 주 26일(목)에 야생화 명인 야천(野泉)을 따라가 평창 백룡동굴을 품은 백운산의 암벽에서 동강할미꽃을 보았다. 서너 해 벼르다가 드디어 상봉한 이 희귀한 꽃. 다른 꽃도 그렇지만 사진보다 실물이 훨씬 매력 넘쳤다. 요조숙녀 같은 기품에 청보라와 분홍이 어우러진 고운 자태는 이름과 너무 달랐고 아무리 보아도 할미가 연상되지 않았다.[백세 노모도 동의] 그래서 고교 동기들의 카톡 방에 소담스런 사진을 올리며 나는 일단 동강아라리꽃이라고 부르겠다고 했다. 정선 평창 영월의 유역에서 3월 말 4월 초에 피는 이 꽃은 벼랑에 서서 그 아래에서 굽이굽이 멀리 한강으로 흘러가는 강물을 내려다보며 무슨 말을 하는 듯하였다.
그 여로에 이어 요즘 화제작 영화 「왕과 사는 남자」로 더욱 유명해진 단종(1441-1457)의 유배지 청령포(淸泠浦)에 갔다. 오랜만에 다시 갔던 그곳에서 이번에는 노산대(魯山臺)에도 올라 서울 쪽을 바라보았는데, 그러자 단종을 동정하는 심정을 넘어 마치 단종이 된 듯하였다. 묵묵히 감회에 차있던 야천이 말했다. “사육신의 단종 복위운동이 성공했더라면...” 사실의 역사에서 가정은 그 자체가 결국 허망하다는 공허를 그가 모를 리 없지만, 그의 이어지는 탄식에 나 역시 너무 유감스러웠다. “아마 연산군의 폭정도 없었을 것이고, 사대사화도, 당쟁도 없었을 텐데...” 그렇다. 만약 그 운동이 성공해 왕위를 바로 세우고 패악의 불궤패거리들을 징치했더라면 이후 조선의 역사 맥락과 기개가 달랐을 뿐만 아니라 권력과 정쟁의 몰염치와 표리부동 위선도 정도를 달리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조선의 역사에서 세조의 왕위 찬탈 쿠데타인 계유정난(癸酉靖難, 1453)은 조선의 건국이념 성리학 질서를 철저하게 배반한 패륜 사태였다. 세조가 주나라의 주공이 조카 성왕을 보좌했듯 단종을 보좌했더라면... 이 역시 허탈한 가정이지만 그랬더라면 왕으로 추존되었을 것이고, 능도 말 그대로 광릉(光陵)이 될 수 있었을 텐데...
단종의 능 장릉(莊陵)에 들러 그 어려운 협박과 굴복의 시기에 목숨을 걸고 단종에게 의리를 지켰던 분들을 모신 장판옥(藏版屋)의 268인 위패를 살펴보고, 관풍헌(觀風軒)의 자규루(子規樓)에 갔다. 단종의 「자규사(子規詞」가 게시되어 있다.
月白夜(월백야), 蜀魂啾(촉혼추) 달 밝은 밤, 두견이 우는데
含愁情(함수정), 依樓頭(의루두) 근심 품고, 누대 앞에 기대었네
爾啼悲(이제비), 我聞苦(아문고) 네가 슬피 우니, 나는 듣기가 괴롭구나
無爾聲(금이성), 無我愁(아무수) 네 울음소리가 없다면, 나도 근심이 없으련만
寄語世上苦勞人(기어세상고노인) 세상의 괴로운 사람들이여
愼莫登春三月子規樓(신막등춘삼월자규루) 부디 춘삼월 두견이 우는 누대엔 오르지 말게나
- 기태완 역
화자는 달빛으로 하얀 밤에 두견 우는 소리를 듣고 ‘근심 품고, 누대 앞에 기대었’다고 하고, 또 ‘네 울음소리가 없다면, 나도 근심이 없으련만’이라 하는데, 화자를 단종이라 하기에 난처하다.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단종은 이미 ‘근심’을 ‘품고’ 있어 잠들기 어려웠을 것이며, 두견 울고 달 밝아서 더욱 잠들지 못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또, ‘세상의 괴로운 사람들이여/부디 춘삼월 두견이 우는 누대엔 오르지 말게나’란 진술은 화자가 자신의 해당 체험을 전제한 권유인데, 단종은 1457년 6월에 노산군으로 강등되고 청령포로 유배되었으며, 같은 해 여름에 장마로 강물이 범람하려 하자 영월 관아의 동헌인 관풍헌으로 거처가 옮겨졌다가 관풍헌에서 세조의 명령으로 10월에 피살되었다. 이러한 사정에서 화자가 단종이라면 ‘춘삼월’이라 하기 어렵고 게다가 ‘자규루’라고 하기도 어렵다. 누의 당시 이름은 ‘매죽루(梅竹樓)’였다.
하지만 우리는 이 작품으로 하여 깊은 달빛으로 적막한 한밤에 잠 이루지 못하며 매죽루에서 고뇌하던 단종과 그 심정을 잘 추상(推想)할 수 있고, 단종을 동정한 나머지 묘사를 넘어 감정이입도 의탁한 시심에 공명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이 작품은 단종을 애모하고 세조를 증오한 한 시인이 두견의 울음과 단종의 유적지를 매개로 단종을 대신해 지었다고 할 수 있겠다.
세조는 조카의 왕위를 찬탈하고 자신의 권좌를 정당화하기 위해 단종 1년 계유(1453)부터 세조 3년 정축(1457)에 이르기까지 4년간에 걸쳐 왕인 단종과 아우 안평대군과 금성대군을 위시하여 충신 열사 등 무려 300여 명을 살육하였다. 이런 비리와 비극의 시작인 계유정난(癸酉靖難)을 ‘나라의 위난을 평정하였다’는 뜻인 ‘정난(靖難)’이라 하는 건 아무래도 실정에 부합되지 않는다. 공자의 ‘명부정즉언불순(名不正則言不順 : 이름이 옳지 않으면 하는 말이 불순해진다)의 사례이며, 이에 따라 계유동란(癸酉動亂)이라고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참고로 『세조실록』 제9권 3년 10월 신해조에 “임금이 금성대군(錦城大君)을 사사(賜死)하자, 노산군이 이 소식을 듣고 스스로 목매어 죽으니 예절을 갖추어 장사지냈다”고 하였는데 이 또한 사실 왜곡의 농락에 해당한다. 『장릉지』(1711)에 “세조 3년(丁丑年) 10월 24일 유시(酉時)에 공생(貢生)이 활끈으로 노산군의 목을 졸라 숨지게 하였다. 노산군의 옥체는 청령포(淸泠浦)의 강물에 던져 버린 것을 영월호장 엄흥도(嚴興道)가 몰래 거두어 영월군 북쪽 5리쯤의 동을지(冬乙旨)에 매장했다”는 기록이 있고, 영월 사람들부터 그렇게 알고 있다.
사관과 달리 세조에게 아부하지 않고 절의를 지켰던 분들 중 한 분의 시 한 편을 더 읽어보자.
白鷗宜白沙(백구의백사) 흰 갈매기는 마땅히 하얀 모래톱
莫向春草碧(막향춘초벽) 파란 봄풀 돋은 언덕으로 가지 마라
不須自分明(불수자분명) 하얀 색깔이 너무 도드라져
易爲人所識(이위인소식) 쉬이 사람들 눈에 드러나겠네
- 「백구시(白鷗詩)」/김한계(金漢啓 : 1414-1461)
이 시는 시인이 칠원현감漆原縣監으로 재직하던 1455년(단종 3년) 윤 6월에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뺏기자 통분하여 사직하면서 지은 시이다. 이 시는 우선 보기에 한 강변 풍경을 묘사한 서경 작품으로 볼 수 있지만 지절의 풍자 알레고리로 감상하면 더 좋을 것이다. ‘하얀 모래톱’은 부귀영화와 거리가 먼 척박한 자리, ‘흰 갈매기’는 그 위치를 기꺼이 감내하며 의리와 분수를 지키는 이, ‘언덕’은 훈풍이 감돌고 새 기운으로 장래가 보장되는 자리지만 비리로 오염된 곳, ‘파란 봄풀’은 겉으로는 그럴듯하나 속은 불의로 얼룩진 이를 표상한다고 할 수 있다. 아마 시인은 이 시를 지어 자신의 관련 지향과 각오와, 종생 은거를 마음에 새겨 자신을 격려하였던 것 같다. 산은 산이고 강은 강이며, 역사의 모든 시기에 ‘흰 갈매기’의 ‘하얀 모래톱’과 ‘파란 봄풀’의 ‘언덕’이 있다. 참고로 세조世祖가 등극한 이해 12월 27일에 민심을 수습하려고 전국에 걸쳐 대소 내외 종정신從政臣들에게 좌익원종공佐翼原從功 일・이・삼등을 포상하였다. 시인에게도 공이등(功二等)으로 서록(叙錄)하고 가자일품(加資一品)에 자손이 승음承蔭한다는 전교傳敎가 있었으나 시인은 받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