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종의 문학잡설(166)] ‘혼돈 속에 늘 있는 그런 봄을’
지난 주 토요일에 또 야천을 따라 가평군 청평면에 있는 화야산(和也山) 계곡으로, 희게 핀 얼레지꽃을 보러갔다. 걷다가 알았는데, 시내가 흘러내리는 계곡을 오르는 길이 특이하다면 특이하였다. 돌들 사이로 발목부터 무릎 가까이 담겨져, 삐죽삐죽한 돌들을 징검다리처럼 밟으면서 그 다음에 밟을 돌들도 선택해야 하는 구간이 끊어졌다 이어지고, 이어지곤 하였다. 그날 이른 아침 전화에서 숙취에서 깨지 못한 나를 왜 야천이 만류하였는지 그제야 알았지만 힘들어 하는 나를 야천과 그의 친구가 힘들어할까봐 후회를 겨우 억제하며 겨우 따라갔다.
어느덧 시내 오른쪽 완만한 경사지에서 얼레지꽃이 보였다. 얼레지꽃은 야생화치고는 잎이 별로 커서 주목되는데 의외에도 어색하게 얼룩이 번져 있어 보기에 우선 마뜩하지 않다. 그런데 그 꽃과 꽃의 생리를 관찰하면 우리의 시선이 달라진다. 보라와 분홍이 어우러진 수줍은 원통형 꽃이 아름답기도 하고, 해가 나기 전에는 고개를 아래로 가지런히 숙이고 있다가 햇빛이 내리면 내릴수록 오므렸던 꽃잎들이 조금씩 점점 열린다. 햇빛이 지속되면 꽃잎들이 자신을 뒤로 활짝 젖히고 또 바짝 말아 올리는, 이전과 모양이 완연히 달라지는 특징이 있다. 꽃술을 잘 보호하고 그 어느 꽃보다 햇빛에 꽃술을 전폭 드러내려고 전력투구하는 것이다. 여전히 잘 보이지 않는 검게도 보이는 짙은 보라색 꽃술은 여전히 자신을 받쳐주는 듯한 넓은 잎을 보고 있지만.
계곡을 오를 때가 아직 아침 무렵에다 날도 흐려 얼레지꽃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계곡을 오를수록 얼레지꽃이 무리로 서식하고 있었고, 옅은 운무 사이 집단의 그런 정경은 기이하게 보이기도 하였다.
셋은 나뉘어 샅샅이 살피며 올라갔으나 흰 얼레지꽃을 찾지 못했다. 흰 얼레지꽃은 아주 드물어 전문 탐화가(探花家)들도 조우를 무척 기대한다고 한다. 며칠 전에 화야산 계곡에서 보았다는 소문이 나자 야천과 야천의 친구도 일약 나선 것이었다. 계곡을 나뉘어 오르면서 두세 시간 살폈으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 작은 평지에서 쉬며 유감스러워하다가 문득, 다발로 거의 한 아름 핀 노란 꽃무더기를 보았다. 근처에 다른 꽃들도 없이 외따로 서있기도 해 이미 나도 바라보고 있는데, 야천이 가까이 가 ‘피나물꽃’이라고 하였다. 샛노란 꽃다발은 근접해서 살피자 더욱 눈부셔 사람을 고혹할 만 했다. 꽃들 아래 사이좋고 훤출한 꽃대들도 보기 좋았다. 그런데 초보자에게 경고하는 어조의 말이 들려왔다. “이 꽃 이름이 왜 그러냐 하면, 꽃대 속에 특이하게도 붉은 색에 가까운 진액이 있고, 마치 피같이 보여서 그래. 나물이라고 하지만 독초야. 사람이 먹으면 안 돼” 표리부동과 아이러니가 어찌 이 꽃만 그럴까만 유감스러웠다. 그 둘레에서 서성거렸다. 흰 얼레지꽃 대신 이 꽃을 보러온 거 아닌가 하며.
시간을 체크하니 이윽고 오후 1시이고 해서 우리는 하산하기로 하였다. 도중에 햇빛이 수풀 사이로 쏟아졌다. 두 사람은 다시 흰 얼레지꽃을 찾으면서 내려오고 지친 나는 터벅터벅 내려오다가 길 위 산록 암벽 옆에 핀 진달래꽃을 구경하곤 하였다. 가까이 가지 않아서 그런가. 산들바람에 하늘 하늘거리는 진달래꽃들이 점점 가까이 와 흔들렸고 그러면서도 중심을 잃지 않았다.
계곡을 거의 내려온 지점에서 기다려 셋이 만났는데, 야천이 웃는 얼굴로 다가와 시내 옆 돌 틈에서 그 꽃을 만났다며 기뻐하였다. 그가 찍은 휴대폰 사진의 흰 얼레지꽃을 한참 감상하며 어느덧 숙취가 말끔하게 가신 상태를 자각하였고, 따라온 자신을 반쯤 칭찬하였다.
이튿날. 야천이 모처럼 고교 동기 카톡에 화야산 관련 기행문을 사진과 함께 올렸고, 본인 뜻과 무관하게 시로 볼 수 있는 글을 마무리로 첨부하였다.
봄이구나.
마음까지 봄이구나.
가끔은 겨울도 느껴지고 여름도 느껴지는
그런 봄이구나.
혼돈 속에 늘 있는 그런 봄을 시처럼 느끼며
맑은 계곡의 새처럼 날개를 편다.
꽃이 좋아 꽃이 좋아.
내 맘속 꽃을 봅니다.
- 장태상
1연 1, 2행에서 봄을 맞아 ‘마음까지 봄’이라고 하고는 5행에서 ‘혼돈’을 언급하여 다시 읽었다. ‘혼돈’은 변화가 거듭되는 봄 날씨의 속성을 이치에 따라 환기한 자연스러운 여운이긴 하나 비중이 높고, 우리가 봄을 맞아 보통 느끼거나 기대하는 심정과 다르다. 게다가 5행에서 동시에 그런 ‘봄’을 언제나 ‘시처럼’ 느낀다고 한다. 시도 봄 날씨와 같다는 뜻도 있지만, 그런 봄 날씨, 다시 말해 ‘겨울도 느껴지고 여름도 느껴지는’ 봄의 상태, 즉 그 ‘혼돈’을 말뜻 그대로 제시하면서도 미덕으로 예찬한다. 나아가 자신의 상태를 ‘맑은 계곡의 새처럼 날개를 편다’고, ‘혼돈’이 자신을 비상시킬 동력이라고까지 의식하고 있다. 2연 2행에서 ‘내 맘속 꽃을 봅니다’고 토로했는데, 이는 1연 1, 2행 탄성의 정체를 급기야 더 구체화하는 마무리.
야천은 그날 도중에 두세 번이나 내게 무슨 시상이 떠오르느냐고 말해보라고 재촉하여, 쩔쩔 매다시피 사양하며 그러지 말고 그대가 직접 시를 쓰라고 반격하였는데, 야천의 친구가 동조하는 것 같았다. 답답해서 본인이 직접 나선 것이다. 게다가 야천은 끝내 흰 얼레지꽃을 만나지 않았나. 낙심 끝에서 발견하였기에 환희를 가라앉히기 어려웠을 것이다. 시시한 시상을 말하지 않은 자신을 남은 반 칭찬하면서 보람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야천은 기행문을 올린 후 고교 동기들에게 다음 글도 올렸다.
꽃들로 채워지던 4월도 어느덧 중순이네요. 여름도 멀지 않은 곳에서 시간을 삼키며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요. 사람들도 점차 옷들을 가볍게 하며 순응하고~ 그렇게 인생도 흘러갑니다. 오늘 하루도 행복으로 충실하게 채워가며 멋진 인생 누리소서.
심상하면서도 심상치 않은 말이다. 조언이면서도 보고이고. 한창 개화 때를 넘긴 얼레지꽃들을 본 마지막 소감으로 이제 올해 봄과 봄꽃이 지기 시작하고 여름으로 이동하려는 이즈음에 미련을 갖지 말고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자고 한다. 평범한 환기지만 사사로워 말할 필요가 없었던 숙취의 원인을 생각하며 그래야 하지 않을까 자신을 위로할 수 있었다.
그날 늦은 오후에 또 외출했다. 밤에 집으로 돌아오는 숭실대입구역에선가 우연히 안전문에 게시된 다음 시를 읽었다.
살기 위해서다
푸른 잎이 가시로 변한 것도
몸통만 둥글게 부풀리는 것도
살기 위해서다
뜨거운 태양을 머리에 이고
긴 시간 버티어본 적 있는가
생명의 푸른 기운
그것 지키려고 사방에 가시를 둔 거다
때로는 가시가 나를 찔러도
언젠가 붉게 꽃피우려고
견디는 거다
- 「선인장」/박경희
이 시의 메시지를 아마 평소라도 경시하지는 않았겠지만 우리 주변의 선인장 같은 이들의 단순한 변명으로 여겼을 것 같은데, 낮에 보았던 피나물꽃이라 불리는 무더기 샛노란꽃이 상기되면서 다시 읽었다. 모종 벽이 뚫리면서 타자 이해가 좀 넓어지는 듯한 진경을 느꼈다. 참고로 9행에서 ‘때로는 가시가 나를’ 찌른다고 하였는데, 타인의 ‘가시’가 자신을 찌르기도 한다는 뜻도 함축되어 있지 않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