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종의 문학잡설(167) ‘몸 안에 갇힌 그대 몸뚱이 풀어줄 이’
호랑이는 죽어도 가죽을 남기고, 시인은 죽어도 시집을 남긴다. 서가 한쪽에서 나란히 사이좋은, 이 세속에서 일탈해 이제 유명(幽明)을 달리하는 작고 시인들의 생전 시집들. 그 한 권을 꺼내 들었다. 우연이라 할 수 없다. 의연하고 활달한 지인 시인의 40대 사진을 보자말자, “시 쓰는 것이 죄지”라던 독백 같은 말이 시집 이면에서 먼 메아리 밀려오듯 떠올랐다. 시작에서 벗어나려고 해도 아무래도 그럴 수 없어서 무슨 방황하듯 매여 있는 신세라는 취지의 토로였다. 당시 자리를 같이 했던 사람들에게 자신을 돌아보게 했으며 무언의 공감은 오히려 위로가 되었다. 그 시인의 시집에서 다음 시편이 주목을 끌었다. 공교롭게도 표제작.
이리저리 길을 만들어 온통 세상을 어질러 놓고
그 길에다 빙빙 바퀴를 달아보고
내 어릴 적 세발 자전거
길과 함께 달리다 길 속에서 넘어졌네
코스모스 도열한 통학길의 두 발 자전거
바퀴 같은 바퀴벌레는
가끔 헛발을 내딛어도 길을 잃지 않았네
바큇살 다리 허공에서 공회전시키면
벌렁 하늘 보고 누운 자리
그 자리에 또
새로운 길 하나 보였지만
은빛 종다리 울음 휘감고 돌아가던
빗살무늬 은륜의 내 사랑
이제 어디에도 찾을 수 없고 나는
발만 무성해 슬픈 바퀴벌레
빗금의 황색 안전선 안에 갇힌
수많은 발들이 길 하나를 만들지 못하네
- 「자전거와 바퀴벌레」 / 이기윤(1954-2009)
첫 행에서 화자는 자신의 지난 삶을 직절(直截) 회고한다. ‘이리저리 길을 만들어 온통 세상을 어질러 놓’은 모양이라고. 인생의 추이를 ‘길’에 관련시킨 시들이 많지만 두괄방식으로 게다가 과장과 혐오로 자신을 조롱하듯 성찰한 시선 제시는 드물다고 하겠다. 화자도 꿈이 많았던 듯 자신이 헤아려도 여러 추구를 시도해왔다는 것인데, 하지만 돌이켜보니, 돌이킬 수 없게 세월이 경과한 현재, ‘세상’을 뒤섞거나 뒤얽어 어지럽혔을 뿐이었다고 탄식한다. 물론 고의로 그랬다는 것은 아니다. 결과가 그렇다는 것이다. 또 여기서 ‘세상’도 말 그대로가 아니라 범주가 제한된다. 어쩌다 길들도 너저분해져 주변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을 것이라는. 그리고 그 과정에서 화자는 ‘어릴 적’에 타던 ‘세발 자전거’의 ‘바퀴’를 그 ‘길’들에 ‘달아보’았었다고 고백한다. 자신의 여러 추구는 유년의 꿈이 그 동기이자 동력이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2연에 따르면 화자에게 상처로 남은 첫 좌절이 이미 청소년 시절에 있었다. ‘코스모스 도열한 통학길’에서 ‘두발 자전거’ 타다 ‘넘어졌’듯이. 그렇다면 이런 낙담도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다. 그런데 2연 3행에서 화자는 문득 자신을 ‘바퀴 같은 바퀴벌레’라고 비하하여 우리를 자극하는데, 당시 화자의 관련 자의식이 아니라 현재나 현재에 가까운 시기에 급기야 형성된 자의식 표출이다. 3연에서 화자는 그 이후 ‘가끔 헛발을 내딛어도 길을 잃지 않았’다고 하는 바, 그때처럼 좌절하였으나 역시 그때처럼 ‘바큇살 다리 허공에서 공회전시키면’, 즉 멈췄던 자전거 바퀴를 돌리듯 하면, 그 자리는 그래도 ‘하늘을 보고 누운 자리’가 되었고, ‘새로운 길’을 전망할 수 있었다는 기억에서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새로운 길’은 자신의 곁에서 ‘은빛 종다리 울음 휘감고 돌아가던/빗살무늬 은륜’과 같다고 하였다. 좌절하였어도 화자는 자신을 격려하며 새 모색 시도를 재기할 수 있었다. 그것은 ‘빗살무늬 은륜의 내 사랑’이란 토로에서 알 수 있듯 ‘사랑’과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회고를 마치자말자 ‘이제 어디에도 찾을 수 없’다고 현재 형편을 한탄한다. 우리 독자에게도 이제 화자의 현재 심경이 문제가 된다. 게다가 화자는 ‘나는/발만 무성해 슬픈 바퀴벌레’라고 자신을 더욱 지탄하는데, 이 우울한 자기혐시가 감상이나 과장이 아닌가 여겨지기도 하지만, 그 직후에 묘사한 ‘빗금의 황색 안전선 안에 갇힌 수많은 발들이 길 하나를 만들지 못하네’란 회오의 탄식에서 그 추정을 거두게 된다.
또 우리는 화자를 동정만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도 열심히 살긴 하였으나 사실 아직 스스로 자부할 수 있는 ‘길 하나를 만들’었다고 자인할 수 없는 처지가 아닌가. 4연 5행에서 제기된 대로 그 ‘길’은 ‘빗금의 황색 안전선 안’이 아니라 그 밖에 있어야 한다는 기본 전제가 선명하고 외면하거나 경시할 수 없다. ‘빗금의 황색 안전선 안’은 우리가 교통 일상에서 잘 인지하고 있는 대로, 위험지역과 빗금 표시를 경계로 하여 구분된 안전지대이며, 범박하고 평탄하지만 바로 그래서 ‘호랑이 가죽’으로 비유하기는 불가한 인생을 지칭하는 환유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가슴은 서늘해진다. 어디든 갈 수 있는 ‘발’이란 뜻을 함축한 자신의 ‘수많은 발’을 보며 화자가 부끄러워하는 아이러니 심경에 더욱. ‘빗금의 황색 안전선 안’에 갇혀 기어코 ‘길 하나를 만들지 못한 그 ‘발’. 전체 탄식의 맥락으로 보아 외부의 어떤 제어로 갇힌 것이 아니라, 실은 그 ‘발’을 포함해 자신을 스스로 가두었다는 시사가 있는 듯하다. 방종이나 무모는 아니었을지언정 자신도 모르게 안일에 유사한 타성에 젖었었다는 고백을 하고 있다고 추정할 수 있는 기미가 있지 않나 한다.
우리는 한숨을 쉬면서 시집을 접을 것이 아니라 같은 시인의 다음 시를 읽어야 한다.
1
서울에서 떠밀려 밀려온 그대여
일주문 밖에서
무얼 그리 중얼거리나
물소리 한 줌으로
귀를 다 씻은 줄 알거든
몸 안에 갇힌 그대 몸뚱이
풀어줄 이
그대밖에 또 있는가
2
하루해를 소주병에 가득 담아 들고
달동네 달언덕 훠어이 훠어이 넘어가면
찬란한 세상마저도 그렇게 부질없거든
벗기면 벗길수록 어두워지고
벗으면 벗을수록 밝아지는
그대 몸 속 외길 하나
- 「몸 안에 갇힌 몸을」
1의 ‘서울에서 떠밀려 밀려’와 어느 산사 ‘일주문 밖에서’ ‘무얼’ 자꾸 ‘중얼거리’는 대상 인물을 우리는 「자전거와 바퀴벌레」의 화자와 같은 인물로 볼 수 있다. 산사로 오르는 계곡의 시내 ‘물소리 한 줌으로/귀를 다 씻’고 무언가 깨달았으면서도 왜 또 그러느냐고 핀잔하는 이 시의 화자도 다른 인물이 아니라, 대상 인물과 같은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여기서 일견 두 인물로 보이지만 기실 화자 한 사람의 서로 다른 내면일 것이다.
우리는 화자 자신이 자신에게 한 소리가 독백된 1의 3연을 정작 주목하여야 한다. ‘몸 안에 갇힌 그대 몸뚱이/풀어줄 이/그대밖에 또 있는가’. ‘몸’과 ‘몸 안에 갇힌’ ‘몸뚱이’가 무엇인지 따져보지 않아도 우리도 자해무애(自解無碍)에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2의 1연의 ‘하루 해를 소주병에 가득 담아’ ‘달언덕’을 넘어가는 나그네 비전을 음미하다보면, ‘나’를 대상으로 ‘벗기면 벗길수록’ ‘찬란한 세상’처럼 어두워’지지만, ‘나’가 ‘나’를 ‘벗으면 벗을수록’ ‘몸 속’에 갇혀 있던 단 한군데로만 난 ‘외길’이 드러나며 ‘밝아’진다는 화자의 생각에도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자전거와 바퀴벌레」의 화자는 곡절 끝에 결국 자신의 ‘길’을 찾았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