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종의 문학잡설(168)] ‘일생에 딱 한 번 그때 울었어’

김승종 / 시인 · 전 연성대 교수

 

 정년 이후에 지인들이 요즘 뭐하며 지내느냐고 물으면 우물쭈물하다가 〈일송김동삼선생기념사업회〉에서 일한다고 하면, 거의 선생을 모르는 눈치이고 미안한 표정으로 어떤 분이냐고 묻는 분도 있다. 현재와 미래에 소홀할 수 있는 과거지향이 아닐까 유감을 제어하다가 일제 시기 일송의 좌우통합 지향이 이 시대의 갈등과 분열 극복에 한 자양이 되겠기에 결국 유감스러워졌다. 최근에 만해 한용운(1879-1944)과 일송 김동삼(1878-1937)의 일화를 다룬, 세 해 전에 발표된 다음 시를 읽었다.          

 

젊은 시절이었지.

만주 굴라재 고개 넘다

머리에 총 맞은 그날.

 

독립군 후보생들이었어.

작은 키에 까까머리 나를

일본 밀정으로 오인했다는

 

그들이 무릎 꿇고 비는 동안

나도 빌었지. 마취 없이 수술받는 나보다

칼 쥔 손 먼저 기도해 달라고.

 

김동삼이라고 했던가. 맞아.

그의 손이 자꾸 떨리는 걸 보았어.

뒷걸음치는 흰 소의 눈망울 같았지.

 

수술 마친 그가 낮게 외쳤어.

활불(活佛)일세! 그러나 이후

나는 평생 고개 흔드는 체머리로 살아야 했지.

 

서대문형무소에서 그가 죽은 날

북정 고개 넘어 싣고 와서는

내 방에 모시고 오일장을 치렀지.

 

일생에 딱 한 번 그때 울었어.

그는 쉰아홉, 나는 쉰여덟.

광복 8년 전이었지.

 

지금 생각하니

죽어서 더 오래 산

그가 진짜 활불이었어.

 

고개가 흔들릴 때마다

한 땀씩 그가 내 머리에 새겨놓은

만주의 햇살이 그립기도 해.

 

그땐 젊어서

마취 없이도 세상 견딜 만했지.

하루하루가 활불이었어. 그때 우리는.

    - 「굴라재 활불 사건-만해시편」/고두현      

 

 이 시를 보다 감상하기 위해 두 분의 조우와 굴라재 사건의 이모저모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만해는 1927년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이야기 –만주 산간에서 청년의 총에 맞어서」(『별건곤』 8호)에서 술회했지만 구체 사실과 부대 사정을 기록하지 않았는데, 기억이 희미해서가 아니라 신흥무관학교 관련 사정을 일제가 파악할까 우려해서 그랬던 것이 분명하다. 

 1912년 가을 33세 만해는 만주 만행(萬行)에 나서 길림성 유하현 합니하에 있는 신흥학교를 찾아 갔다. 이회영 김동삼 등 운영진과 학생들을 만나 하룻밤 유숙하며 조국의 독립을 의논했고, 이튿날 통화현으로 넘어가는 굴라재에서 뒤따라온 신흥학교 학생 김동석 김명윤의 총격을 받았다. 전날 밤에 만해는 “일청전쟁과 일로전쟁에서 이기고 … 동양의 패자가 된 일본을 상대로 만주에서 이같이 소수 청년들을 훈련하여 무력으로 왜구와 싸워 독립을 전취(戰取)하겠다는 것은 그 기개만은 장쾌하나 차(此) 소위 당랑거철(螳螂拒轍) 격 … 죽으나 사나 우리는 다대수인 국내 동포의 군중 속으로 들어가서 그네들과 고락을 같이 하면서 정신적으로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것이 보다 실효”있다고 주장했는데(이용조[1930년 만당 회원], 「만해 대선사 묘소를 참배하고」, 『불교』, 신년호, 1948. 1), 1910년 3월 신민회의 결정, 즉 일제의 폭압과 검거로 국내에서 더 이상 항일활동을 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국내 애국계몽 운동을 유지하면서 만주에 독립기지를 건설해 독립군을 길러 국내에 진공해야 한다는 방략에 따라 고초를 감내하며 이역에서 훈련받던 학생들은 그런 주장을 펴는 떠돌이 중을 수상하게 여기며 이간 작간을 펴는 일제의 밀정으로 알고 행동한 것이었다. 곡절 끝에 병원에서 사죄하는 두 학생에게, “제군이 나 같은 사람을 왜놈의 밀정으로 사격할만한 용기를 가졌으니, 우리의 장래 독립은 문제없을 것으로 믿는다. 이 점에서 나는 죽어도 만족하겠노라고 하였다”(상동)고 하였다. 이런 풍모에서 우리는 뒷날 『님의 침묵』(1926) 등등에서 피력된 만해의 간절하고 도저한 불퇴전의 의지와 기상을 미리 보는데, 자신의 주장이 학생들의 오해를 살 수도 있다고 내심 인정했던 것 같기도 하다. 

 머리가 피격되고도 간신히 살아나 중국인촌으로 피신한 만해는 전날 밤, “임란(壬亂)의 승병(僧兵)을 거울삼아 조선 8도의 대승병단이 봉기할 시기”라고 권유해 인상 깊었던 일송에게 사람을 보내 사정을 알렸고, 달려온 일송의 주선으로 통화 적십자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기력을 회복하였다.(강석주[선학원 시절 시봉 제자. 조계종 총무원장 역임],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 불교근세백년 ; 한용운」, 〈중앙일보〉, 1979.8.30.) 

 위 시 3연 3행과 4, 5연에서 ‘마취 없이 수술’한 의사가 ‘김동삼’이라고 하는데 실제로는 ‘김필순[1878-1919. 독립유공자. 세브란스의전 출신, 한국 최초 면허 의사. 신민회 회원. 만주 망명. 김마리아의 숙부, 김규식의 처남]이다. 시인이 이 사실을 아무래도 모를 리 없었을 텐데도 그렇게 한 것은 이 시의 두 주인공 만해와 일송을 부각하는 초점을 유지하려고, 이른 바 ‘시적 허용’의 범위에서 시도한 사례일 것이다. 또 이 수술은 크게 보면 일송의 알선으로 이행이 가능하였기에 그렇게 쓸 수 있다고 판단한 듯하다. 의외의 학생 사고에 책임을 통감한 일송의 당시 심정이 마치 ‘손이 자꾸 떨리는’ 것과 같고, 황망한 우려의 시선이 ‘뒷걸음치는 흰 소의 눈망울 같았’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이러한 상정(想定)은 이 시 6, 7연에서도 보듯, 심우장에서 진행된 ‘일송영결식[1937년 4월 18일(일)]’에서 만해가 민족의 ‘유사지추(有事之秋)’를 거론하며 ‘대성통곡(大聲痛哭)’한 장면이 그 배경일 것이다. 

 민족유일당 재만책진회 중앙집행위원장(1928), 남북만주한족총연합동맹 회장(1929), 한만합작대표회의 의장(1929) 재만한인반제국주의동맹 중앙집행위원장(1930) 등을 역임하며 동분서주하던 일송은 1931년 10월에 하얼빈에서 피체되었고, 1937년 4월 13일 경성감옥에서 옥사하였다. 둘째아들 김용묵과 협동학교 제자 유주희[뒷날 김창숙 비서실장] 정현모[뒷날 안동 을구 제헌의원], 이원혁[뒷날 서울신문 부사장] 등 제자들이 14일에 시신을 인수하여 인사동 경일여관(京一旅館)에 임시 호상소를 차렸고 15일에 안동 선산으로 운구할 예정이었는데(〈조선일보〉, 1937년 4월 15일자),  만해가 찾아와 심우장에서 장례를 치르자고 적극 권유하여 심우장에서 치르기로 하였다.(〈조선일보〉, 1937년 4월 17일자) 

 시인의 의도에 관련하여 이어 주목할 국면은, 화자[만해]가 8연에서 ‘지금 생각하니/죽어서 더 오래 산/그가 진짜 활불이었어’라는 독백. 일송이 만해가 학생들을 오히려 격려하고 ‘마취 없이 수술받는’ 모습을 보며, 그 기상과 의지에 경탄해 5연에서 ‘활불일세!’라고 기린 언급과 대구(對句)를 이루면서, 두 분의 서로 공경하고 친애하는 정서를 잘 부조(浮彫)한다. 만해와 일송은 일생에 걸쳐 단 한 번 조우했을 뿐이지만 조국 독립의 비원(悲願)과 대지(大志)에 헌신하며 무언으로 더욱 소통하였던 지기지우(知己之友)였다고 할 수 있다. 

 만해는 1919년 삼일운동의 주역이고, 대 시인이며, 불교혁신과 민족운동을 독실하게 겸행한 불굴의 독립운동가로 우리 역사에서 그 위상이 걸출하고 아무도 이의가 없다. 그러나 대중은 일송을 잘 모른다. 1921년 상해 임시정부 독립신문 사장으로 박은식의 유촉을 이어 독립운동사에 뜻을 두었고, 1926년 삼부통합 때 참의부 참의장으로 활약했으며, 해방 전후 갖은 난경도 인내하며 1964년에 독립운동사를 탈고하고 작고한 김승학(1881-1964)은 일송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는데 만해의 추도와 평가와 잘 어울린다.           

  “흔히 우리는 만주의 독립운동 하면, 김좌진(1889-1930) 홍범도(1868-1943) 지청천(1888-1957) 이범석(1900-1972) 등의 무장활동을 내세우지만 문무(文武)를 겸했던 항일운동의 거목 김동삼의 활동은 자칫 망각되는 경향이 있다.  

 그는 남만운동(南滿運動)의 지도자로서 1910년대부터 초기의 독립운동에 참여했고, 1931년 9월 만주 사변이 발생된 후, 하르빈에서 일경에게 피체되어 1937년 서울 마포형무소에서 옥사하기까지, 그는 민족 수난기를 통해 많은 독립운동 조직을 지도했을 뿐 아니라, 누구보다도 성실하게 순난(殉難)의 길로 입신하여 투쟁했다는 점에서, 한국 독립운동사상 그가 남긴 업적은 실로 위대성(偉大性)에까지 육박하고 있다. 

 일찍이 중국 본토로 망명, 상해의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갖은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조국 광복을 위해 투쟁한 김구(1876-1949)의 활동과, 더불어 김동삼은 남만의 밀림을 근거로 일제에 대한 과감한 무장투쟁과 민족 운동을 전개했다는 점에서, 그는 만주에서 활약한 한국 독립운동가로서의 상징적 존재였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김승학, 『독립운동사』, 1964. 「남만의 맹호 김동삼」(『세대』, 1972년 3월호, 20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