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종의 문학잡설(169)] ‘껍질 깨고 나가리’

김승종 / 시인 · 전 연성대 교수

 

 지난 5월 1일 노동절 이른 오후에 집 근처 백화점에 갔다가 입구 가판대 안에서 5월 5일 어린이날을 맞아 장난감을 고르는 아이들과 젊은 부모를 보다가 어느덧 한참 서 있었다. 아이들과 부모들의, 곱고 설레는 시선으로 다정하게 장난감을 고르는 얼굴들. 하나같이 천진한 표정에 무슨 문이 열리듯 마음이 맑아지고 밝아졌고, 아이들이 잘 성장하며 향후 삶이 아름답기를 기원했다. 평소와 달리 지속됐던 그 심정을 의아해하면서도 외출에 앞서 읽었던 시의, ‘줄탁동시(啐啄同時)’[병아리가 알을 깨고 밖으로 나가려면 병아리가 안에서 쪼고 어미 닭이 밖에서 쪼아야 한다] 관련 이미지와 철학의 영향이라고 자각했다.

           

저녁 몸속에

새파란 별이 뜬다

회음부에 뜬다

가슴 복판에 배꼽에

뇌 속에서도 뜬다

 

내가 타 죽은

나무가 내 속에 자란다

나는 죽어서

나무 위에

조각달로 뜬다

 

사랑이여

탄생의 미묘한 때를 알려다오

 

껍질 깨고 나가리

박차고 나가

우주가 되리

부활하리

     - 「줄탁(啐啄)」(1987)/김지하(1941-2022)

 

 ‘탄생의 미묘한 때’를 희구하며 ‘껍질 깨고 나가리’라 자신을 격려하는 ‘껍질’ 안 화자. 화자의 의지와 노력과 대등하거나 그 이상일 ‘껍질’ 밖 외원(外援)이 필요하다는 언급이 없지만, 우리는 제목 ‘줄탁’에서 알 수 있고, 이 조력 기원이 3연 ‘사랑이여/탄생의 미묘한 때를 알려다오’에 포괄 함축되어 있다고 느낀다. 

 ‘저녁 몸속에/새파란 별이 뜬다’는 1연 1, 2행은 이 시의 기본 상황. 먼저 1행의 ‘저녁 몸속’이 무엇을 어떤 상태를 비유하는지 추정하여야 감상을 전개할 수 있을 것이다. ‘저녁’의 ‘몸속’이 아니라 ‘저녁’같은 ‘몸속’, 즉 화자가 자신의 ‘몸’을 해 저문 ‘저녁’처럼 쇠락한 상태라고 표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정작 주목해야 하는 국면은 직후에 이어진 조락 상태를 쇄신하는 희망 적시이다. 자신의 그런 ‘몸속’에 ‘새파란 별’이 ‘뜬다’는. 마치 저녁의 광막하고 어두운 하늘에 ‘새파란 별’이 돋아나듯, 그것도 몸의 가장 중요한 부위라 할 ‘회음부’와 ‘가슴’과 ‘뇌’에.    

 1연에서 조성된 이미지를 인식하면서 동시에 우리는 재생의 기미가 함축되어 있다고 느낀다. 2연에서 이 조짐은 강화된다. ‘내 속에 자란’, ‘내가 타 죽은/나무’ ‘위에’ ‘나’는 ‘조각달로 뜬다’. 이 진술에 재생의 의미가 강화되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또 그러나, 우리는 이 대목에서 동시에 분명하게 인지해두어야 한다. 이 ‘나무’가 ‘내 속에 자란’ ‘나무’라는 그 위치를. 그리고 ‘내 속’은 1연 1행의 ‘저녁 몸속’과 같은 표현이고, 그곳에 이 희망 현상이 제시되면서 그 이상의 한계가 병렬 제기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화자는 3연을 거쳐 4연에서 드디어 자신에게 거대한 장벽인 ‘껍질’을 제시하며, ‘껍질 깨고 나가리’라고 외친다. 감격어린 포효인가.  

 췌언이 되더라도 화자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면 좋을 것이다. ‘껍질’ ‘속’ 세계에 있는 화자는 ‘껍질’을 깨고 밖으로 나가기를 간절하게 바라며, 그럴 준비를 한 상태이기도 하다. ‘몸 속’에 ‘새파란 별’이 떴을 뿐만 아니라, 2연 1행에서 ‘내가 타 죽’었다고 했는데, 말 그대로 소사(燒死)했다는 뜻이 아니라, 그럴 정도로 기존의 자신을 적극 경신해서 다른 존재가 되었다는 취지의 수사(修辭)이며, ‘조각달’은 그 표상이다. 우리는 또 ‘조각달’이 달은 달이지만 ‘반달보다 더 이지러진 달’이란 모습을 유념하며 화자가 여전히, 자신을 부족하고 부족한 존재라고 표출하는 시사를 파악해야 한다. 다시 말해, 화자는 절대 한계라 할 ‘껍질’에 자신이 여전히 갇혀 있고, 외부의 협력이 없으면, 그러니까 협동 협업이 없다면 ‘껍질’을 무너트릴 수 없는 형편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한편, 3연 ‘사랑이여/탄생의 미묘한 때를 알려다오’란 독백은 2연 직후에서 그 출현이 좀 느닷없어 보이지만, ‘껍질 깨고 나가리’로 시작하는 4연 뒤로 순연했다면 이 시의 주제 ‘줄탁동시 희구’를 범상하게 했을 구성일 수 있다. 즉 이 시의 주제는 4연의 진술 같아 보이지만, 이제까지 검토로 미루어 보면 3연이야말로 이 시의 주제가 부각된 돌올(突兀) 국면이라고 하겠다. 화자는 기구한다. 내가 ‘껍질’을 깨는 ‘줄(啐)을 시도하면 ‘껍질’ 밖에 있는 존재가 ‘탁(啄)’을 행사할 수 있을 ‘때’, 그 ‘탄생의 미묘한 때’를 ‘사랑이여’ ‘알려’달라고. 

 그리하여 우리는 마지막으로 탄식하듯 기도하듯 주목해야 할 것이다. 화자가 그 ‘때를 알려’주리라고 우러르는 대상이 바로 ‘사랑’이라는 사실을 거듭. 이 ‘사랑’을 우리는 우리가 아는 사랑으로 알아도 좋겠고, 본질이 같으면서도 4연 3행의 ‘우주’ 차원에 결부시켜 확대하면 더 좋을 것이다. ‘껍질’의 속과 밖의 조리(調理)을 통섭할 ‘사랑’. 

 화자가 4연 3행에서 ‘우주가 되리’라고 했는데, 그 무변 세계의 일부가 되겠다는 취지일 것이다. ‘껍질’을 두른 알 ‘속’의 세계와 달리 생명이 제대로 자신을 뜻대로 구현할 수 있고 억압과 불통이 제거된 질서에서 진정한 활동을 펼칠 수 있는 새 차원 세계의.

 참고로, 시인은 이 시의 ‘줄탁동시’를 언급한 적 있다. “달걀 안의 병아리가 때가 돼서 깨고 나오려고 하면 한 부분을 쫀다고. 그런데 그와 동시에 그 어미 닭이 귀신같이 그 부분을 알고 쪼아. 안팎이”라고 말뜻을 풀이하고, “생명과 영성이, 인간의 사회적 변혁과 내적 명상이 하나로 합쳐지는 것, 이게 줄탁이야”라고 자신의 내포 의도를 표명했다.(홍용희 편, 『김지하 마지막 대담(對談)』, 작가, 2023, 34-35쪽)

 즉 ‘껍질’ ‘속’ 화자는 알 속 ‘병아리’로 비유되며, 이 시에서는 그 뜻이 미완의 ‘생명’이나  ‘인간의 사회적 변혁’에 해당한다. ‘껍질’ 밖에서 대기하며 역시 ‘때’를 기다리고 있는 ‘어미 닭’에 비유되는 조력의 주체는 ‘영성(靈性)’이나 ‘내적 명상’에 부합된다. 진정한 사회 변혁을 이루어 만인의 개벽(開闢) 세상을 이루려면, 모두 의지와 노력뿐만 아니라 영성의 명상으로 아집과 편파를 극복한 중도(中道)를 구현하여야 한다는 철학이 이 시의 최종 메시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시인의 이 언급을 존중해야하리. 그러면서도 20세기 일제 강점 이래 현재에 이르기까지 우리 현대사를 직접 간접 저변에서부터 간섭하고 있는 좌우 이데올로기에 매여 있거나 그러기를 자청하는 이 나라의 우리를, ‘껍질’ ‘속’ 화자, 변혁을 소원하면서도 이기에 구속돼 있어 철저하게 경신해야하는 ‘내(나)’가 제유(提喩)한다고 읽고, 새로 ‘탄생’하기 위해, 서로 자신의 폐단과 한계를, 그 종국이 ‘사랑’일 영성의 성찰로 극복하자는 취지로 해석하여도 시인은 고개를 흔들지 않을 것 같다. 지속되는 지겨운 갈등과 충돌을 통섭하여 공공의 에너지로 승화하려면 이 시도 계속 읽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오는 5월 8일은 어버이날이자 시인의 별세 4주기. 저 1991년 봄에 노동자들의 분신이 거리에서 이어지던 미증유의 상황에서 시인은 「젊은 벗들,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는가」(‘죽음의 굿판을 걷어 치워라’, 〈조선일보〉 5월 5일자)를 발표했는데, 우뿐 아니라 좌로부터도 유리되고 혐시되었다. 이 시를 음미하면 더욱 유감스럽지 않을 수 없다. 일방의 득세와 독선은 다른 일방의 울분과 원념을 산출하며, 역사는 같은 구조로 반복될 것이다. 우리는 모두 내심 동의하고 있듯 사회 변혁 관련 소신을 이념이라 내걸지 말고 이데올로기라고 해야 하며, 우선 각각 단점과 미비를 인정하여야 역사에서 배울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