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기의 '수원 詩, 수원 詩人'(103)] 한하운 '보리피리'
보리피리
한 하 운
보리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꽃 청산(靑山)
어린 때 그리워
피-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인환(人寰)의 거리
인간사 그리워
피-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幾山河)
눈물의 언덕을 지나
피-ㄹ 늴리리.
흔히 문둥병이 혹은 나병이라고도 불리는 한센병은 그리 치사율이 높은 질병은 아니다. 그러나 당사자에게는 그 어떤 치명적인 병보다도 가혹했다. 오죽하면 하늘이 내린 형벌, 천형이라고까지 하지 않았나. 부모 형제로부터까지도 버림을 받은 참혹한 질병과 싸우며 한국 시문학사에 한 획을 그은 한하운 시인이 수원과 무슨 인연이 있었을까.
사시사철 다른 풍광을 자랑하는 수원천이지만 그래도 으뜸은 버드나무 가지가 그 어느 때보다도 푸른 치맛자락을 넉넉히 내려주는 이때를 나는 가장 좋아한다. 그래서 버드내가 아닌가. 수원천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유천2교를 지나 바닥에 놓인 자그마한 시비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한하운의 시 ‘보리피리’가 음각되어 있다. 김포 장릉 공원묘원 그의 유택 앞에 서 있는 비석 뒤편에 새겨진 시와 같다. 시인이 해방 이후인 1949년에 이 인근에 있던 하천부락에 살았던 인연으로 이 시비를 세운 것 같다.
전체 4연이 각 연마다 ‘보리피리 불며’로 시작하여 ‘피-ㄹ 닐니리’로 끝난다. 분절과 반복의 운율이 즉석에서 저절로 노래로 흥얼거리게 만드는 시이다. 시인의 그리움과 아픔은 그 사이사이, 즉 2행과 3연으로 이어지는 서정의 흐름으로 읽을 수 있다. 시인의 고향은 함경남도 함흥이다. 분단이 아니어도 나환자가 고향의 동구 안으로 들어서기는 언감생심이다. ‘봄 언덕/고향 그리워//꽃 청산(靑山)/어린 때 그리워’라고 했다. 산골짝마다 진달래 붉은 꽃잎이 흐드러졌던 어린 시절의 꽃 청산, 그 봄 언덕 아래에는 올봄도 여지없이 고맙게도 잘 자란 보리밭의 푸른 물결이 일렁이리라. 사람들의 발길로 넘치는 ‘인환(人寰)의 거리’이다. 그러면 무엇하나. 가는 데마다 뭇사람의 돌팔매를 견뎌야만 한다. 그 누구에게도 다가갈 수 없지만 ‘인간사 그리워’라고 그들 속에 섞여 함께 울고 웃으며 보듬고 살고 싶다. 하지만 문둥이기에 그 어디에도 뿌리를 내릴 수 없었다. ‘방랑의 기산하(幾山河)’라고 했다. 유랑의 길에 넘어야 했고 건너야만 했던, 헤아릴 수 없는 산과 물의 수는 또 몇이었던가. 그 ‘눈물의 언덕’에 보리피리 소리 들린다. ‘피-ㄹ 늴리리.’
보리피리에 대해 달리 그런 생각을 해본다.
한때 중고등학생들의 교과서에 실리기까지 하였던 어느 수필에 ‘보리는 이제 모든 고초와 사명을 다 마친 듯이 고요히 머리를 숙이고 성자인 양 기도를 드린다.’라는 구절이 있다. 물론, 혹독한 겨울을 이겨낸 인내의 장한 기운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숙여’ 겸손·경건함을 나타낸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보리는 아무리 익어도 절대로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오히려 더 고개를 꼿꼿하게 든다.
청운의 꿈을 펴기도 전에 나병에 걸려 평생을 떠돌아야 했고 한때는 이른바 빨갱이로 몰려 고초를 겪어야 했던 시인의 삶을 지탱한 힘은 운명 앞에 결코 고개를 숙이지 않았던 또 다른 자존은 아니었을까.
이제 겨우 5월 중순인데 한여름 땡볕 더위더니, 아침부터 모처럼 더위를 식혀주는 비가 내리신다. 그런데 장마철 장대비처럼 오신다. 세월이 하 수상한 까닭일까.
시인의 시에 작곡가 조념이 곡을 쓴 가곡 ‘보리피리’라도 들어야겠다.
한 하 운 시인
1920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출생
17세 되던 1936년에 한센병으로 진단받음
1948년 월남, 시인으로서의 삶을 시작
동년 8월 수원시 세류동에 있던 한센인 정착촌에 입주 8개월간 지냄
1975년 숙환인 간경화로 영면
시집 『한하운 시초』(1949), 『보리 피리』(1955), 등
자작시 해설집 『황톳길』(19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