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종의 문학잡설(171)] ‘두 손에 장미를 받들고 기도한다’
수식도 비유도 특별한 구문도 없지만 읽는 이가 시로부터가 아니라 마치 자신으로부터 감명이 일어난 듯한 착각을 하게 하는 시가 있다. 수용 주체가 그만큼 그 접응에서 능동 역할로 전환할 수 있었기 때문인가. 〈구상선생기념사업회〉 카톡방에 들렀다가 만난 다음 시에서도 그런 드문 일이 있었다.
2004년 5월 12일
강남성모병원
구상 선생님 장례식장 입구 한구석엔
스님의 흰 고무신
농부의 작업화
그 옆에 목발도 하나 놓여 있었다
흰 고무신은 지리산에서 왔고
바닥이 갈라진 작업화는 강원도 인제에서 왔고
손때 반질반질한 목발은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
문상객들 다 돌아간
새벽 두 시에도
그 자리에 그대로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 「묵화(墨畫)」(2025)/전동균
이 시는 간결한 묘사와 정갈한 진술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 공간이 ‘장례식장’의 ‘한구석에 국한되지 않는다. 남으로 ‘지리산’, 북으로 ‘강원도 인제’로 순식간에 연장되며, ‘손때 반질반질한 목발은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에서는 가늠하기 쉽지 않은 미지의 확장도 이루어져 진다. 자연스럽기 만한 이 전개는 어쩌다 발생한 분외의 부가가 아니다. 시인은 그렇게 은사의 큰 덕행을 드러내려 하였고, 관련 형상화를 잘 시도했기에 발생한 효과이다. 다시 말해 ‘흰 고무신’이 ‘지리산’에서 왔다는 건 그렇다고 하더라도, ‘작업화’가 그 반대편인 ‘인제’에서 왔다고 하는 건 우연한 병렬이 아니라 시인이 자신의 의도에 따라 선택한 조치인 것이다. 게다가 두 신발은 주인의 신분과 직업도 잘 시사하는 유용하고 친근한 기호.
사실 해설이 필요 없는 시지만 군말을 자인하며 더하고 싶은 한마디는, 끝 연, ‘문상객들 다 돌아간/새벽 두 시에도/그 자리에 그대로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에서, ‘새벽 두 시’란 작중 최종 시간을 한 번 더 주목하자는 제안이다. 처음에는 시에서 좀 지나친 군더더기 제시 같았던 1연 1행 ‘2004년 5월 12일’을 필수 요소로 추인하게 하면서, 이 시의 공간과 어울리게 시간마저 구체화한 배려 아닌가. 게다가 이 시의 일인칭 관찰자 화자를 2연 3행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에 이어 독자들이 기록자로 의식할 수 있게 한다. 끝 연도 고인의 유덕을 기리는 이 시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불가결(不可缺)이다. 게다가 끝 연을 읽고서야 우리는 비로소 유종의 미로, 그 빈소의 정경을 볼 수 있다. 연상할 수 있다.
특히, ‘손때 반질반질한 목발’의 주인이 연상돼, 구상 선생의 시선집을 열어, 장애인 관련 시를 찾아 읽었다.
주일(일요일)마다 명동성당엘 가면
초입 언덕에 구걸상자를 앞에 놓고
뇌성마비로 전신이 비틀린
그 친구가 앉아 있다.
그가 거기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지는
한 5년 되었을까?
나하고는 그 언제부터인지
아주 낯익고 친숙해져서
내가 언덕을 오를 양이면
말리서부터 혀 꼬부라진 소리를
지르곤 한다.
그런데 그 친구 이즈막에 와서는
더욱더 우리 우정에 적극성을 띠어
지난주에는 주스 한 병을 건네주었더니
오늘은 장미꽃 한 송이를 들고 있다가,
그 비틀어진 팔과 꼬인 손으로 내주었다.
그 극진한 우정에 화답할 바를 몰라
나는 무안이나 당한 사람처럼
횡하니 성당에 들어와 앉는다.
이윽고 나는 장궤틀에 무릎을 꿇고
두 손에 장미를 받들고 기도한다.
하느님! 당신의 영원한 동산에서는
그와 내가 허물을 벗은 털벌레처럼
나비가 되어 함께 날게 하소서!
- 「어느 친구」/구상
‘5년 전’ 길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어찌 ‘친구’가 될 수 있었을까만 우리는 2연을 읽고, 두 분의 흥미로운 이색 ‘우정’을 인정할 수 있다. 그런데 선생의 ‘주스 한 병‘에, 그 ‘친구’가 하필이면 ‘장미꽃’을 선생에게 내밀다니. 선생은 ‘그 극진한 우정에 화답할 바를 몰라’라고 했으나,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도 혹 연정(戀情)을 상기케도 하는 ‘장미꽃’에 그만 부담을 느끼며 당황한 게 아닌가 한다. 이 사정이 후술되는 ‘나는 무안이나 당한 사람처럼/횡하니 성당에 들어와 앉는다’와 어울릴 것이다.
하지만 선생은 ‘이윽고’ 직전 상황과 자신의 상태를 살피고, ‘두 손에 장미를 받들고 기도한다.’ 우리는 기도의 내용도 궁금하지만, 그 ‘장미’를 선생이 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선생을 위해 안도한다.[우리는 멋쩍고 창피하면 적당한 곳에 버릴 수 있다]. 또 우리는 고양된다. ‘두 손으로 장미를 잡고 기도한다’가 아니라, ‘두 손에 장미를 받들고 기도한다’라서. 우리는 이 진술에서 또한 선생이 ‘장궤틀에 무릎을 꿇’기 직전에 선생은 이미, 그 ‘친구’와 같은 ‘털벌레’라며, 같은 ‘나비’가 되어 ‘함께 날게‘ 해달라는 기도의 말도 결정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