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기의 '수원 詩, 수원 詩人'(104)] 허정예 '태장면 고개'
허 정 예
날계란 깨질까 걷던 그 길에
실바람, 어디선가 등꽃 내음이
싱그럽게 퍼져옵니다
어머니, 넘으시던 태장면 고갯길에
등나무꽃이 피었습니다.
고갯길 넘는 112번 버스 길
눈 비바람 맞으며 광주리 이고
이 고개를 넘으셨다는 어머니
내일 팔 계란이 깨질까
언덕배기 이 길을 몇 번이나 쉬었을까
힘겹게 걷던 모습이
울컥울컥 가시로 피어납니다
밤마다 쑤시는 관절을 매만지며
가파른 삶 푸념하다
첫새벽 후다닥
광주리 이고 나가시던 어머니
태장면 고개
포도송이처럼 영근 등꽃이
그리운 얼굴로 피었습니다
피었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달렸다고 혹은 열렸다고 해야 하나. 등나무에 연보랏빛 꽃이 포도송이처럼 주렁주렁 자리하는 계절이 이맘때이다. 시인은 이 시의 끝 연에서 ‘포도송이처럼 영근 등꽃’이라 했다. ‘영글다’는 과실이나 알곡 등이 알이 들어차서 단단하게 잘 익은 상태를 나타내는 작용 동사이기도 하지만 어떤 사물의 빛이나 현상이 짙어지고 왕성해져서 가장 실하게 제모습을 갖춘다는 뜻으로도 쓴다. ‘핀’, ‘달린’보다 ‘영근’이 늦봄 한창인 등꽃을 가장 적절하게 드러낸 말 같아 뿌듯하게 가슴에 닿는다.
시의 공간적 배경은 태장면 고개이다. 어린 시절 수도 없이 그 고개를 넘었지만 그 어름 어디에 등꽃이 피었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아마 눈물을 훔치면서 넘은 날이 거의 다였던 까닭이지 싶다.
태장면의 행정구역을 일일이 다 짚어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냥 오늘날 망포동과 주변 일대가 태장면이었다. 수원 시내에서 그 동네로 가기 위해 넘어야 하는, 지금의 매교역에서 수원시청으로 넘어가는 길이 태장면 고개이다. 지금이야 다 저마다의 차로 지나치고, 시인이 시에서도 언급한 112번 버스뿐만 아니라 수많은 노선버스 심지어는 지하철까지 닿는 길이지만 그때는 대중교통은 언감생심이고 그냥 모두 다 비포장 고갯길을 걸어서 넘었다.
어머니가 ‘내일 팔 계란이 깨질까/언덕배기 이 길을 몇 번이나 쉬’어 넘던 고개이다. 시인이 시에서 어머니의 모습을 ‘가파른 삶 푸념하다/첫새벽 후다닥/광주리 이고 나가시던 어머니’라고 회상하듯이 그 시절 그 지역에 살던 초동급부들은 그렇게 눈물로 그 고개를 넘었다. 그랬다. 달걀 몇 알 깨어서 양은 그릇에 새우젓 젓국 살짝 풀어 밥을 뜸 들일 때쯤 익힌 계란찜이야말로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건건이임을 어머니도 모르지 않으셨으리라. 그래도 식구들이 다시는 입맛을 다 모르는 척하고 계란을 내다 팔아야 아이들의 월사금도 되고 고무신도 살 수 있었다. 그런데 그 고개에 그 옛날 등꽃이 피었단다. 어머니의 ‘힘겹게 걷던 모습이/울컥울컥 가시로 피’었단다. ‘그리운 얼굴로 피었’단다.
등꽃이 벌써 다 졌으려나. 나도 그 고개에 등꽃이 영글었다면 꽃 송이송이마다 그릴 그리운 얼굴이 많은데. 느닷없이 팔달산에서 소쩍이 운다. 그렇다는 이야기다.
허정예 시인
문파문학 신인상
한국경기시인협회 이사
한국문인협회, 수원문인협회 수원시인협회 회원
시집『시의 온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