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영 광교칼럼] 수원이 기억해야 할 사람 이승언 선생(하)
‘지정되지 않은 국보급 인간문화재’ 평가, 수원지역사 연구에 지대한 공헌
1945년 4월10일에 태어나 2002년 1월20일 57세의 나이로 타계한 이승언 선생과 함께 화성행궁복원추진위원으로 활동했던 임병호 시인은 자신이 논설위원으로 재직하던 경기일보에 그를 추억하는 글 ‘이승언 선생에 관한 추억’(2010, 10, 12)을 썼다.
“이승언 선생은 지독한 자료 수집가”였다면서 “필요한 자료라고 판단되면 수중에 넣을 때까지 그 어디라도 전화를 걸거나 직접 방문, 자료를 발간한 기관의 담당자나 개인 소장 인사를 난감하게 만든 적이 수없이 많았다. 매번 ‘미친 놈’ 소리를 들어가면서도 자료 확보에 대한 욕심은 끝없이 이어졌다”고 회고했다.
이승언 선생이 수집·소장한 자료만 해도 조선후기의 읍지류, 고문서, 교지와 근·현대시기의 시·군지, 읍·면·동지, 지명유래집, 금석문집, 보고서, 문화유적 관련 책자, 지도류 등 4만 여점이나 된다. 임 시인은 “한 개인이 수집했다고 보기에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하다. 더구나 자료 내용을 거의 다 숙지하고 있어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으로 불렸다”고 증언했다.
그는 안산, 의왕, 시흥, 안양 등지의 문화재와 유적, 인물과 행적, 생활문화와 자연유산, 지명유래 등을 출간했다. 수원으로 거주지를 옮긴 후에는 수원관련 자료도 상당수 수집하고 출간하기도 했다. 한말·일제하 수원기사를 찾아내 색인집을 발행했으며 수원 관련 자료를 중심으로 논문을 발표하고 수원화성행궁자료 등 학술 강연도 여러 차례 실시했다.
일제 지명 바로잡기, 학교 교명 작명, 초등학교 향토교재 감수, 전적(典籍) 발굴, 서화·초상·사진 발굴, 전통민속놀이 고증·발굴·지도(指導), 행정지명·도로명 작명 및 자문 등에도 큰 족적을 남겼다.
그와 친분이 남달랐던 주혁 박사는 2019년 10월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가 발행한 ‘경기학광장’ 2019년 가을호에서 “선생은 학계에서 통용되는 ‘시민권’ 밖에 있었지만, 향토사의 중앙에서 한 순간도 벗어난 적이 없었다”며 추모했다. 그러면서 그의 삶을 “몸에 밴 ‘기록정신’과 ‘자료수집’을 통한 향토사연구로 압축”했다.
그의 평생은 일관됐다. 시흥군지 상임위원,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과천향토사 상임위원, 서울문화사학회 이사, 수원성(화성) 축성200주년기념사업회 기획조사부장 등이 그가 걸어온 발자취다.
주 박사는 “자료수집과 향토사 분야에서 한 우물을 제대로 깊고 넓게 팠던 ‘지정되지 않은 국보급 인간문화재’”였다고 말한다.
이승언 선생은 향토사 자료수집과 연구에만 전념한 것이 아니다.
공공기관의 증빙서류와 영수증, 지폐와 동전, 담배, 1930년대의 빛바랜 우편엽서와 편지, 호외, 10월 유신 팸플릿, 잡지·신문 창간호(현대문학, 선데이서울, 한겨레신문 등) 생활사의 자료들도 수천 건이나 모은 수집광이기도 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2002년은 ‘2002 한일 월드컵’이 열려 온 나라가 열기에 휩싸였던 해였다.
공교롭게도 같은 해 수원화성행궁복원추진위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이종학 선생도 세상을 떠났다.
두 사람 모두 내가 존경하던 인물들로서 자료수집에 전 생애를 바쳤다는 공통점이 있다.
지금도 “김 시인, 내가 이번에 규장각에서 이런 걸 발견했는데, 어때? 기사거리가 될 것 같아?”라며 활짝 웃곤 했던 그의 얼굴과 목소리를 잊을 수 없다.
그렇게 매사에 활력이 넘치던 사람이었는데 어느 날 날아온 부고에 상청에 모인 사람들은 그저 죄 없는 소주만 들이킬 뿐이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벌써 24년이 흘렀다.
그런데 지금도 “나 시흥사람, 오늘 저녁 바쁜 일 있어? 내가 찾은 재미있는 자료 보여줄 테니 만날까?”라고 전화를 걸어올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