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드라마 ‘21세기 대군부인’을 둘러싸고 역사 왜곡 논란이 불거졌다. 입헌군주제 왕국을 배경으로 한 극 중에서 신하들이 왕에게 ‘만세’가 아닌 ‘천세’를 외치고, 황제의 상징인 십이면류관 대신 구류면류관을 사용한 설정이 문제가 됐다. 이를 두고 우리나라를 중국의 제후국으로 격하한 것 아니냐는 비판을 제기했다.
이에 배우들이 사죄하고 제작진은 해당 장면의 수정과 편집을 검토하고 있다. 이런데도 논란은 가시지 않고 있다. 국회 국민동의청원 게시판에 콘텐츠 폐기 요구 청원이 5만 명을 넘었고, 소관 상임위원회도 심사 절차에 들어갔다는 보도다.
허구의 드라마 설정에도 대중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중국이 오랫동안 국가 차원에서 주변국 역사와 문화를 자국 역사에 편입하려는 시도를 이어왔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고구려와 발해를 중국 지방정권으로 규정한 동북공정이다. 한복과 김치마저 중국 소수민족 문화 또는 중국 기원 문화인 것처럼 주장한다.
중국이 이런 행태를 보이는 것은 중화사상 때문이다. 자신들의 문명이 세계의 중심이며 다른 문명보다 우월하다는 세계관을 오랫동안 유지해 왔다. 특히 한자를 공유했던 동아시아 국가들을 문화적으로 중국의 영향권, 나아가 종속적 관계에 있었던 존재로 해석하려는 경향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공공 영역에서조차 무턱대고 한자를 사용하는 것은 걱정이다. 얼마 전 문을 연 ‘지관서가’ 역시 한자 간판을 사용하고 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둘러보면 정문에 교명을 한자로 새긴 곳이 적지 않다. 신문과 방송에서도 인명의 성씨나 국가 이름을 한자로 표기하는 경우를 쉽게 볼 수 있다.
상당수의 한자 사용은 필요에 따른 선택이라기보다 과거의 표현 방식이 관성적으로 남아 있는 측면이 크다. 시대가 변화하고 언어 환경이 크게 달라졌음에도 오랜 세월 이어져 온 관행과 언어 습관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이는 한글 중심의 언어생활이 지닌 의미와 가치에 대해 충분히 성찰하지 못한 결과이기도 하다.
한자 문화권에 속한 국가들 가운데 중화권을 제외하고 일상생활에서 한자를 주요 표기 체계로 사용하는 나라는 사실상 일본만 남았다. 행정문서와 신문, 출판물은 물론 일상적인 의사소통에서도 한자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한자를 배제한 채 문자 생활을 하는 것이 어렵다. 반면 한국은 한글만으로도 모든 사회·문화·학술 영역을 충분히 표현하고 소통할 수 있다.
중국은 주변 국가들이 여전히 한자를 사용하는 모습을 자국 문화의 영향력과 전통이 이어지고 있는 사례로 받아들이곤 한다. 실제로 중국 관광객들은 한국에서 한자 간판이나 표기를 볼 때 중화 문화권의 흔적으로 인식하기도 한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과거 중국 문화의 영향 아래 있었고 지금도 그 역사적 잔재를 남기고 있다는 모습으로 비칠 수 있다.
15세기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을 창제·반포하며 “나라의 말씀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라고 밝혔다. 이는 중국의 문자 체계에 의존하지 않고 우리 민족의 말과 소리를 정확하게 담아낼 수 있는 독자적인 문자를 마련하려는 자주정신의 표현이었다. 이러한 정신은 1896년 4월 7일 창간된 독립신문에도 이어졌다. 독립신문은 청나라 간섭에서 벗어나 자주독립 국가로 나아가려는 의지를 담아 창간됐다. 그리고 그 실천적 수단으로 당시 지배적이었던 한문 대신 한글을 중심으로 지면을 구성했다.
한자 사용을 하지 말자는 주장에 대해 일부에서는 삼국시대 이래 한문으로 기록된 방대한 문화유산을 거론하며 반문한다. 물론 그 유산이 지닌 역사적·학술적 가치는 매우 크며, 이를 보존하고 연구하는 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문화유산의 보존과 오늘날 문자사용은 구분해야 한다. 한자는 과거 기록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 필요한 소중한 자산이지만, 현대 사회의 언어생활에서 의존해야 할 문자는 아니다.
2000년대 들어 국가와 시민사회는 친일 잔재를 청산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 이는 단순히 과거를 정리하는 작업이 아니라 왜곡되거나 훼손된 역사를 바로 세우고 우리의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관성적으로 이어져 온 한자 사용 역시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익숙함에 기대어 사용하는 한자보다는 우리말과 한글 중심의 표현을 확대해 나가는 것이 시대 변화에 부합하는 방향일 수 있다.
물론 친일 잔재 청산과 한글 중심 언어생활의 확립을 동일선상에서 비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한글은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문자이자 우리 민족의 자주정신과 문화적 독립성을 담고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단순한 문자 체계를 넘어 국가 정체성과 문화적 자긍심을 상징하는 자산인 셈이다.
대한민국은 세계가 주목하는 경제 강국이자 문화 강국으로 성장했다. 이 배경에는 한글이 있다. 한글은 높은 문해력을 바탕으로 교육의 기회를 넓혔고, 지식의 축적과 확산을 이끌며 국가 발전의 든든한 토대가 됐다. 일상에서도 한자를 사용해야 할 뚜렷한 이유를 찾기 어렵다.
한글의 위상과 사용 범위를 넓혀가는 일은 단순한 언어 정책의 문제를 넘어 우리 역사와 문화의 주체성을 분명히 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의 과제는 한글이 지닌 독창성과 우수성, 그리고 문화적 가치를 미래 세대에 온전히 계승하는 데 있다. 그 첫걸음은 공공 영역에서 불필요한 한자 표기를 없애고 한글 중심의 언어 환경을 확립하는 것이다. 이는 한글의 가치를 실천으로 보여주는 가장 기본적인 노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