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슨 황이 최근에 엔비디아의 향후 투자 대상으로 코리아의 피지컬 로봇 산업을 염두에 둔다고 밝혀 우리의 관련 관심을 증폭시켰다. 최근에 공장이나 물류센터에서 일하는 듯한 휴머노이드를 뉴스 화면에서 보았는데, 우리는 공장에서 도래할 그라 하기도 어색하고 그것들이라고 하기도 어색한 휴머노이드와 지낼 준비를 이제 해야 하는가. 전문가들에 따르면 2028년 전후하여 공공장소나 서비스업종에서 만날 수 있고, 빠르면 2032년 전후하여 가정에서 가사를 돕는 휴머노이드와 함께할 수 있다고 한다. 우리는 관계와 태도를 잘 설정하며 그런대로 잘 어울릴 수 있을 것인가.
다음 시의 화자를, 휴머노이드가 우리보다 더 자세하게 그 성향을 학생들에게 설명할 수 있고, 또 유사한 시도 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중 일부일 화자처럼 실제로 그렇게 살며 한숨을 쉬거나 땀이 나거나 울거나 혈압이 오르거나 진저리치거나 나아가 자신을 희생하거나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남편이나 아내, 연인이나 친구, 심지어 적이나 원수 같은 존재가 되어 서로 삶과 운명에 영향을 주거나 받거나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쉽게 우는 것이란 쉽게 귀를 여는 것
그만큼 너에게로 가까이 간다는 것
내 문은 작은 손에도
순하게 열린다
잦은 이사에 지붕 새고 벽과 벽은 금이 간다
사람들이 담장을 쳐 나를 고이 가둘 때
눈가가 짓무르는 건
작은 방문 열린 거다
한때는 문 단단한 오렌지가 부러웠고,
가끔은 견고한 석류가 그리웠다
밤마다 가장 두려운 것
나를 안은 얇은 상처
- 「귤-얇은 집」/정상미
1연에서 우리는 화자 ‘나’를 대강 알 수 있다. 1행 ‘쉽게 우는 것이란 쉽게 귀를 여는 것’이란 진술에서 ‘나’가 감수성이 그저 예민하다기보다는 풍부하고, 상대의 처지나 상대와 자신의 작은 일에도 상대 위주로 잘 헤아리며 공감 공명하는 인물이란 것을. 그러면서 혹 우리는 이 인물이 타자의 사연과 곡절에 감정이 헤프거나 유약해서가 아닌가 일말의 의심을 하지만 2행 ‘그만큼 너에게로 가까이 간다는 것’이란 진술에서 ‘나’가 적극이라 할 자신의 그 공감과 공명이 감상(感傷)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에 기인한 동정의 발로라고 언명하고 있다고 확인하게 된다.
이런 인물은 우리 중에서 많지 않을 것이다. 이 괄목할 심성은 타고난 유다른 자질일 수도 있지만 여러 자타 요인으로 모면하지 못하는 어리석고 난처하고 슬프고 우스운 인간의 운명에 자신을 포함하여 자비(慈悲)로 통찰하거나 사랑으로 포용하거나 인의(仁義)로 분발하는 자의 지향이자 생리라고 하겠다.
2연의 ‘순하게 열’리는 ‘내 문’은 ‘내 마음’의, ‘네’ ‘작은 손’은 사소하다고도 할 수 있는 상대의 상처나 호소 등등의 환유이겠다. 3연은 화자가 자신의 그 관련 삶의 한 이면을 간명하게 묘사하는 국면이다. ‘얇은 집’은 자신의 은유, ‘이사’는 모종 ‘인간관계 동요’의 환유, 눈비 새는 ‘지붕’과 금간 ‘벽’은 감내를 각오했지만 있을 수밖에 없는 후유증, 그리고 ‘담장’ 관련 국면은 화자의 동정과 대응에 오히려 거리를 두는 사람들이 내보이는 태도를 환기하는 수사(修辭)가 아닐까 한다.
잘 지은 ‘집’도 그런 길항의 세월도 흐르면서 헤어지고 마모되지 않을 수 없다. 4연 ‘눈가가 짓무르는 건/작은 방문 열린 거다’는 그 진전 진술로 보인다. 얇은 ‘귤’의 껍질과 쉽게 짓무르’는 모습을 화자의 ‘눈가’에 겹쳐 떠올리면 감상에 좋겠다. ‘작은 방문’ 관련 운운은 다시 2, 3연의 ‘집’ 이미지에 결부시켜 그 ‘집’의 한 ‘작은 방문’이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허술하게 ‘열린’ 바람직하지 않은 상태를 운위하고 있다고 읽을 수 있다. 참고로, 이 ‘작은 방문’은 말 그대로 2연의 ‘문’과 다르다. 2연의 ‘문’은 ‘집’의 대문이며, ‘작은 방문’은 ‘집’의 여러 ‘작은 방’들 중 한 ‘문’이다. 4연에서 그 ‘방’이 ‘열린’ 상태와 2연의 대문이 ‘열린’ 상태도 다르다. 전자는 앞에서 점검했듯, 의지 발로 아량의 감수성 작동이고, 후자는 다시 말해 내면의 한 상흔 상태이다.
그래서 아니 그러나 화자는 5연에서 자신의 현재 상태를 언명한다. ‘한때는 문 단단한 오렌지가 부러웠고,/가끔은 견고한 석류가 그리웠다’고. 이 시행의 취지 해설은 이제 동어반복이 되겠지만 ‘한때’ 세계와 타인과 자신에게도 실망하여 연성(軟性)의 ‘귤’[‘얇은 집’]과 같은 자신을 후회한 적이 있었다는 토로이다. 우리는 이 시행에 함축된, 하지만 현재 조금도 후회하지 않고 있다는 자의식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마지막 연 6연을 거듭 읽어야 할 것이다. ‘밤마다 가장 두려운 것/나를 안은 얇은 상처’라는 결구. 그렇다. 그대로 읽어서는 안 될 것이다. 현재 화자가 진정 ‘두려운 것’은 무엇인가. ‘나를 안은 얇은 상처’라고 한다. 이 ‘얇은 상처’는 ‘나를 안은’ ‘상처’, 그렇다면 우리는 소통하는 타자의 상처를 동정하다가 겪어야 하는, 마치 ‘귤’의 껍질 같은 자신의 연민에 해당하는 상처를 화자가 반어로 펼친 진술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감상의 말미에 이르러, 우리는 이 시 ‘나’의 ‘너’가 여러 사람으로 변환하거나 대체할 수 있다는 여지를 문득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남편일 수도 아내일 수도 자식일 수도 있고, 친구나 이웃일 수도 있고, 심지어 스쳐 지나치는 타인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 동의하지는 않겠지만 이러한 인물을 사단칠정(四端七情)이 최고로 계발된 인격이라 할 수 있을 것이고, 아무리 휴머노이드가 개량에 개량을 거듭한다고 하더라도 이런 인물과 같은 그나 그것이 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전망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생각에 이르면서 어느덧 우리는 혹 자신에게 왜 이런 남편이나 아내나 자식이나 친구나 이웃이 없느냐고 탄식하다가 시의 ‘나’를 깊이 동정하면서 또한 문득 자신이 되고 싶은 인물로 생각할지 모르겠다. 우리는 우리 모두에게 불성(佛性)이 있고, 이기의 기(氣)를 제어하는 대아(大我)의 리(理)도 있으며, 원수도 포용하는 사랑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자각하고, 또 주변에서 이미 확인하지 않았느냐고 자신에게 반문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탄식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