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종의 문학잡설(173)] ‘이승에선 자식 위한 한뉘의 삶’

김승종 / 전 연성대 교수·시인

 

 17살에 41살 홀아비와 결혼하였고, 31살에 과부가 된 어머니, 전실 기출 자식들을 길러 결혼시키고 고향 집에서 홀로 오래 지내다가 거동이 어렵게 되자, 73세 아들 시인은 97세 노모에게 돌아가 수발하며 봉양에 나선다. 두 해 가깝게. 그러다가 어머니는 감기에 걸려 폐에 가래가 고여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 받았고, 의사가 쇠약해진 어머니를 병원 부설 요양병원에 모시기를 권유한다. 또 주변에서 “이제는 너무 직접 봉양하려고만 집착하지 말아라. 무리해서 생명 연장 조치도 하지 말아라. 환자(어머니)의 속뜻도 원하지 않은 일일 것이다”고 조언한다. 

 시인은 “어머니 홀로 남겨두고 차마 발길이 떨어지겠는가. 비장하게 돌아서 나와야 만 하는 길밖에 도리가 없는가. 그렇게 남들과 똑같이 나도 한 치 다름없는 비정한 인간이 되고 마는 그 길밖에 없는가. … 어떻게 해야 만이 인간으로서 이전에 자식으로서 참바른 길(道)이요 참도리라 하겠는가. 하느님이시여! 답해주소서”라고 생애 최대의 고민을 한다.(『님 떠나신 자리 맴도는 그리움』, 도서출판 진원, 2024, 27-29쪽) 우리도 알다시피 요양원 입소는 ‘현대판 고려장’이며, 시인은 어머니를 이전처럼 어머니가 기거했던 시골집에서 모실 수 있으며, 또 도시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에서 아내와 함께 모실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요양원 입소는 유일무이한 방도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선택의 문제. 다음 시인의 시는 어머니의 빈집에서 요양원에 갇히다시피 한 어머니를 생각하며 쓴 회오의 자책도 흥건하고, 새삼 우리를 여러 모로 생각에 잠기게 한다. 

 

새까만 심장을 빠알갛게 불태워

조석으로 소신공양하던 널

요즘엔 보기도 힘든 시대가 되었구나.

어느 성자인들 너만 한 희생 치르려고

이 세상에 태어난 이가 있으랴.

하물며 인간이 아무리 희생한들 

어찌 널 본받을 수 있으랴.

이 혼탁한 세상 악한 세태에

네 소신공양 그 한 줄기 불꽃은 

이 세상 모든 어머니의 삶일 것이다.

이승에선 자식 위한 한뉘의 삶

온몸으로 희생과 고난 눈물 감추고

때가 이르면 예고도 없이 눈 감으신다.

 

이승에서 한 때는 세상살이가 버거워

하늘이 까마득해져 보이지 않아 눈 감고

때로는 억장이 무너져 눈 감기도 한다.

이래저래 숯검댕이 되어버린 심장은

차마 보여줄 수도 없어 평생을 감추시고 사시다가

어느날 예고도 없이 홀연히 학처럼 날아 한세상 아니 오신 듯

그렇게 떠나시는 게 이 세상 모든 어머니의 삶이다.

자식이 자식을 낳아 그 자식이

고희를 넘기고도 제 어머니는 마냥 늙지

않으시고 그 자리에 정지해 머물러

계시는 줄 착각 속에 사는 이 세상은

아둔한 자식들, 청맹과니 저들만의 천국이요,

참으로 어리석은 착각 속의 요지경이다.

 

樹欲靜而風不止[수욕정이풍부지]

子欲養而親不待[자욕양이친부대] 

나무는 고요히 있으려하나

바람이 그치지 아니하고

자식이 봉양하려고 해도

부모는 기다려주지 않더라

  - 「구공탄의 삶, 어머니의 삶」/이병준

        

 시인 화자가 일찍부터 어머니의 삶을 ‘소신공양(燒身供養)’으로 보고, 불타는 ‘구공탄’ 이미지로 가슴에 뜨겁게 간직해왔다는 정황에 우리는 감탄한다. 그런데 ‘어느 성자인들 너만 한 희생 치르려고/이 세상에 태어난 이가 있으랴’라는, 이전에 듣지 못한 메시지에는 잠시 수긍을 유보할 것 같다. 우리는 시인의 이 언급을 과람하다며 거리를 두려는 자신을 자각하다가 그러다가 이내 저어하며, 시인과 시인 어머니의 개인사를 추가해 전제로 하면서 이 신념을 인정하게 된다. 게다가 ‘이 혼탁한 세상 악한 세태’에 관련하여 ‘그 한 줄기 불꽃은/이 세상 모든 어머니의 삶일 것이다’란 시행을 읽으면서 우리의 어머니도 시인의 어머니처럼 단순한 타자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자신이 따라 할 수 없는 그 헌신의 사랑에 한 인간으로서 타자로서 감동하며 어머니를 가장 인간다운 인간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자식들에게 ‘차마 보여줄 수’ 없는 상처를 ‘평생’ ‘감추시고 사시다가/어느날 예고도 없이 홀연히 학처럼 날아 한세상 아니 오신 듯’ ‘떠나시는 게 이 세상 모든 어머니의 삶’이란 소견에, 우리는 어머니의 삶을 더욱 반추하게 된다. 촛불 같았으면 그래도 나았을 것인가. 구공탄으로 자신을 남김없이 태우고 태워 가난한 집의 온돌을 데우다가[빛나는 검은 윤기 흑발이 성기고 초라한 백발이 되도록] 소진되어 소리 없이 꺼져가는.    

 이 사모곡은 우리가 기대하는 결말, 어머니의 그 희생을 기리는 음미의 부연으로 마치지 않는다. 드디어 이 시의 중심 메시지가 출현한다.       

 ‘고희를 넘기고도 제 어머니는 마냥 늙지/않으시고 그 자리에 정지해 머물러/계시는 줄 착각 속에 사는 이 세상’을 시인은 탄식하며 ‘아둔한 자식들’의 ‘청맹과니’ ‘천국이요’ ‘착각 속의 요지경’이라고 풍자하는 것이다. 이 대비(對比) 이 부각은 물론 무엇보다 먼저 시인이 자신을 겨냥하고 있지만, 같은 사정의 세태에 포함된 우리에게도 짐짓 연장되어 우리도 외면하지 못하고 심장에 털 나듯 부끄럽다. 이제 직접 이 시의 주석처럼 토로한 시인 자신의 소회를 참조하는 것이 좋겠다.  

 

  풍수지탄(風樹之嘆)의 아주 오랜 옛글의 말귀를 왜 인간의 자식들은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일찍 깨우치지도 못하는 걸까? 이승을 하직할 적에 범벅이 된 눈물 양동이로 쏟아낸들 낙엽 한 잎의 가치보다 못한 허망한 짓인 것을 인간은 곰보다도 더 미련한 곰탱이로 살 길 왜 자청(自請)하는가? 아흔여덟의 어머니를 요양원에 모셔두고 지나온 시간에 대한 참회와 아픔은 결코 자정(自淨)도 치유도 안 될 일이란 걸 절감하게 되니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가슴만 아파져오는 느낌이 절실하다. 이승에서는 결코 떨쳐버릴 수 없이 안고 살다 가야 할 숙업(宿業)이기에 걱정도 기가 막히니 허망한 넋두리 밖에 나오지 않는다.  

 

 필요 없는 말이지만 이 비탄 어린 의문과 질책 엉긴 소회는 우리 모두의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