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향교 공고 판에 어제 시상식을 하고 미처 정리하지 못한 어린이 백일장 당선작이 그대로 붙어 있었다. 점심 먹고 오후 서예 연습을 하러 가던 길에 무심코 바라 본 곳에 흙 어쩌고 하는 구절이 눈에 뜨여 “뭐, 흙?”하며 “어린이 백일장이라더니 무슨 흙 이야기인가”하는 의구심이 들어 자세히 들여다본다.
제목이 '나의 흙이 되주신 부모님'이라는 동시로 금상을 탄 작품이었다. 제목에서부터 4, 3, 3, 운율이 돋보였고, 부모님을 만물을 품어서 키워내는 대지의 흙에 비유한 것을 보고 기가 턱 막혔다.
“이 아이가 지금 주역 곤괘 이야기를 하고 있잖아.”
중얼거리면서 동시를 읽어 내려갔다.
주역은 음양의 변화로 64괘를 만들고, 64괘로 만물의 변화를 상징하는 동양학의 기본이 되는 경전중의 경전이다. 남성이 건(乾)이고 하늘이며, 여성이 곤(坤)이고 땅이다. 땅은 지(地)이고, 흙은 토(土)이다.
음양론 다음으로 나온 물체론이 오행론이다. 오행은 질량에 따라 수, 화, 목, 금, 토로 발생 순서에 따라 목, 화, 토, 금, 수로 분류되며 상생과 상극으로 변화를 주도한다.
동시라서 길지가 않다. 먼저 시 전문을 읽어 보자.
나의 흙이 되어주신 부모님
정예윤(천일초등학고 6학년 1반)
어두운 흙 속에 갇혀있던
자그마한 씨
얼른, 얼른 빛을 보고 싶어
안달이 났네
그 소리를 들은 흙이
문을 열어준다
그 틈으로 씨는
쑥쑥 자란다
작은 씨가 햇빛과 물을 먹고 싶다며
흙은 하늘에게 말씀을 드려
작은 씨가 빛과 물을
야금야금 먹게 해 준다
바람이 씨를 데려가려 하면
흙이 씨의 다리를 붙잡고
씨가 다리가 아프면
흙은 자리를 내어준다
튼튼하게 자란
작은 씨를 보는 흙은
뿌듯하기만 하다.
다 읽고 나니 가슴이 먹먹해 진다. 55세에 조기 정년퇴직으로 전반기 인생을 끝내고, 22년을 오로지 동양학문인 한문에 매달려 정진해 온 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자연의 이치를 본 받아서 사람답게 살아가려는 성(誠)과 경(敬)의 길이 이 짧은 동시 한 편에서 느껴지다니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원형리정(元亨利貞)의 원대한 여행을 준비하며 안달이 다 났다네. 그런데 그 안달을 빛이라고 하네. 인류의 욕심을 씻어 명명덕(明明德)을 실현해 줄 그 찬란한 빛, 태고 적 혼돈을 밝혀주던 그 빛, 이 아이가 정말 그 빛을 얼른얼른 보고 싶어서 안달이 났단 말인가?
천지인(天地人) 삼재가 자기의 본분을 다하니 나는 대지의 틈바구니에 뿌리를 내리고 쑥 쑥 자란다. 자사선생이 노래한 위육지묘(位育之妙)가 귓가에 쟁쟁거린다.
‘흙은 하늘에게 말씀을 드려’
이 열 한자에 사람이 지켜야 할 예의 삼백과 곡례 삼천이 다 들어 있다. 중용 어디쯤 나오는 “획호상 유도하니 불신호 붕우면 불획호상이리라”하고 길게 이어지는 구절까지 줄줄이 이어진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풍파가 몰려 와 어려움이 생기면 상부상조하여 서로를 구휼하고, 상호 따뜻한 배려를 실천하며 살다가 후인을 위해 아낌없이 자리를 내어 준다.
여기쯤 읽을 때 공자님의 자상한 목소리가 들린다.
“사람이 사람답지 못하면 예는 배워서 어디다 쓸꼬!”
마지막 구절을 읽고 나는 무릎을 탁 치고 말았다.
자연은 사사로운 마음이 없기 때문에 지극히 성실하면서, 지극히 공평하다. 그래서 성(誠) 자체는 천도이고 성지자(誠之者)는 인도이다.
한편 성인은 어진 마음이 있어서 본성을 찾는 피조물을 보면 뿌듯해 하신다.
이 아이는 부모님이 뿌듯해 하심을 알았다. 한 발만 더 미루어 나가면 천지자연을 주관하는 성인의 마음도 느낄 것이다. 이 점이 바로 오늘 내가 깨우친 희망이다.
게다가, 삼천 여년을 한자를 써 온 우리에게는 한자문화를 쉽게 이해하는 특수 유전자가 있다.
동시 한 편을 읽으면서 뭉게뭉게 피어오르던 의구심이 사라지고, 우리 특수 디엔에이를 믿고 싶어진다. 꿈이 있는 한 우리는 무너지지 않는다.
우리는 언제라도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젊은이를 만날 것이고 그 글을 같은 눈높이에서 심사해서 뽑아 주는 선생님들이 계실 것을 확신한다.
원형리정, 우주 한 바퀴를 돌고 온 기분이다.